오피니언 취재일기

최중경 차관의 오발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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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오전 서울 명동 은행회관. 최중경 기획재정부 제1차관이 경제·금융상황 점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나타나자 기자들이 에워쌌다. 전날 원-달러 환율이 장중 10원가량 급락한 데 대한 의견을 묻기 위해서였다.

최 차관은 “환율 시세를 조종하는 세력이 있는지 조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어 “(환율 하락을) 주도한 은행이 있는지 알아볼 계획”이라고도 했다. 최 차관은 “환율의 움직임에 나쁜 의도를 갖고 영향을 미치는 것은 주식시장의 시세 조정에 버금가는 행동”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날 상황은 이랬다. 원-달러 환율은 992원까지 올랐다가 달러 매물이 쏟아지면서 980.5원으로 떨어졌다. 한 외환딜러는 “최근 시장의 관심은 AIG-뉴브리지 컨소시엄이 하나로텔레콤 지분 매각 대금 1조원(약 11억 달러)을 언제 달러로 바꿀지에 쏠려 있었다”며 “이미 그 돈이 달러로 다 환전됐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은행들이 대거 달러를 내다 팔았다”고 말했다. 대규모 수요를 예상하고 달러를 사 뒀던 은행들이 그 수요가 사라졌다는 소문을 듣고 달러를 팔자 환율이 하락했다는 설명이다. 최 차관은 바로 이 소문을 유포한 세력이 있는지 조사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에선 최 차관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 나왔다. 정부가 시장의 힘을 너무 과소평가한다는 것이다. 한 딜러는 “루머가 영향을 주긴 했겠지만 시장이 루머만 따라가진 않는다”며 “시장을 완전히 바보로 아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딜러는 최 차관의 발언이 시장에 더 악영향을 준다고 비난했다. 그는 “환율을 특정 수준에 묶어 두려면 차라리 고정환율제를 하지 왜 변동환율제를 하느냐”고 되물었다.

당국자가 환율이 10원 올라갈 때는 가만히 있다가 10원 떨어지면 신경질적인 구두 개입을 하는 것은 높은 수가 아니다. 되레 정부가 원하는 환율 방어선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꼴이다. 이 경우 투기세력이 달려들 위험은 더 커지는 법이다.

최 차관은 2003년 옛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장 시절 환율 하락을 무리하게 막으려다 수조원의 나랏돈을 축낸 경험이 있다. 최 차관이야말로 환율 시세를 관리하려다 실패한 장본인이었던 셈이다. 수업료가 부족했던 것일까.

이상렬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