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국민은 卒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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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흔히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에 비유되곤 한다.아마도 정치가 사회에 대해 지니는 전반적인 조타기능 때문이 아닌가 싶다.그러기에 정치가 제대로 순항하는가 여부에 따라 국민의 삶과 나라의 명운이 도약과 재난으로 갈라지게 마련이다.
이번 지방선거를 계기로 이 땅의 생각있는 국민 가운데 우리네정치에 무언가 중대한 잘못이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 같다.최근의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거의 3분의2에 가까운 국민이 현재의 정당체제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한 사람의 보스를 중심으로 지역주의에 기반한 정당구조가 바로 그것이다.
민자당.민주당.자민련등 그 몇 안되는 소수 대주주에 의한 계보정치에 의해 사당화(私黨化)돼 있는 것이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대중민주주의라는 세계사적 흐름과는 아랑곳 없이 농경문화 시대의 붕당정치 수준을 못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김대중(金大中)씨의 정계복귀 선언이 주는 충격은 그 사실 자체보다도 현실정치의 몰가치성과 무규범성에 있다.그의 정계복귀는우연적이라기 보다 상황적으로 예견돼 있는 일이다.한국정치의 「큰 손」인 3金이 경쟁적 보완관계를 유지하고 있 는한 그 어떤형태로든 한 사람의 인위적인 퇴장은 이루어지기 어렵다.연합.야합,혹은 통합과 같은 제휴가 자신의 勢 확대를 위해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삼각 정립의 미묘한 역학이다.오늘의 동맹자가 내일의 적대자로 바뀌는 합종연횡이 수시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것이다. 원래 정치에 은퇴란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은퇴선언 자체가 정치적 의미를 갖는 통과의례일 뿐이다.정치인의 은퇴여부는종국적으로 국민의 평가와 심판에 달릴 수밖에 없다.정계은퇴 이후 대통령으로 화려하게 복귀하는 데 성공한 드골은 『정 치가는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자신도 믿지 않는다.그런 말을 남들이 믿을 때 놀라는 것은 정치가 자신이다』라는 의미심장한 얘기를 한적이 있다.
우리를 진정 서글프게 만드는 것은 신당 결성을 둘러싼 민주당의 내분에서 나타나고 있는 실종된 정치도의와 공인의식이다.제아무리「오너」마음이라 하더라도 「경영자 총재」를 그렇게 함부로 내쫓으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공당이라면 최소한 당규에 따른 원칙과 절차에 의해 당의 개편을 시도해야 마땅하다.21세기에 대비해 젊은세대의 기상과 열망을 수용하겠다는 의지가 무색할 정도로 신당창당 추진세력의 행태는 너무도 자기모순적이다.
금번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을 선택한 국민은 하루 아침에 잘못된정당을 지지한 꼴이 되고 말았다.그동안 일부 국민의 기대를 받아왔던 개혁모임소속 의원들도 지나칠 정도로 명리(名利)에 집착한 나머지 자신의 입지 확보만을 위한 현실주의에 빠져있다는 비난을 모면키 어렵다.바야흐로 한국정치는 지역주의에 터한 권력분점의 상태로 접어들고 있다.지대(地代)추구형 정치엘리트간의 지역카르텔이 형성된 셈이다.물론 여소야대 지방정치의 등장은 그동안 중앙정부에 의한 행정독점을 견제 하는데는 나름의 역할을 할것으로 보인다.「벽을 치면 대들보가 운다」는 옛말처럼 지방정치의 건전한 활성화가 경직되고 독선적인 중앙정치의 혁신을 가져오리라 기대할 수도 있다.
다만 김대중씨가 주창한 지역등권주의가 국민통합에 저해적인 일면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중앙집권에 대비한 지방분권은 있어도지역등권이란 다소 모호한 용어다.지역패권주의에 대한 반명제(反命題)로서 지역등권주의가 유효하다면 그것들은 지 역통합주의로 합일돼야 한다.지역등권은 연방제 국가에서나 가능한 형태로 자칫잘못하면 체제분열과 지방대립을 증폭시킬 우려가 높다.
***지역등권은 修辭 과거 지역감정의 가장 큰 피해자로서 그누구보다도 망국적인 지역주의를 타파해야 할 그가 지역등권이라는교묘한 수사에 의해 지방정치의 장악을 시도했다는 점은 매우 역설적이다.5,6共 세력을 단죄하는데 앞장서야 할 그가 오히려 그들을 지지기반의 확장을 위해 끌어안는 모습속에서 나라와 대권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안타까울 뿐이다.돌이켜보면 40대 기수론이 나온지 이미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정치는 여전히 YS,DJ,JP라는「큰손」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민주정치의 안정성은 적법한 후계구도의 확립에 의해보장된다.이른바 차세대 지도자로 자처하는 50대들의「홀로서기」에 의한 후삼국시대의 정면돌파를 고대해마지 않는다.
〈서울대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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