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역사] 22. 인생입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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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필자가 프랑스 연극 '마류우스'를 번역해 무대에 올렸던 명동의 시공관 전경.

'코리아 브로드캐스팅 시스템(Korea Broadcasting System)'이라고 했다. KBS는 대한민국의 정보망 중심이었다. 내가 거기 다닌다는 것을 친구들은 환영했다. 특히 예과에서 문리대 불문과로 올라온 이진구(李鎭求)와 정기수(丁奇洙)는 부러워했다. 이진구는 후일 이화여대 불문과 창업 교수가 된다. 이따금 수필이나 단편소설을 써가지고 와서 방송에 참여했다.

주로 김희창.유호.김성림.최요안(崔要安)씨가 맡아오던 '어찌 하리까'시간이 나한테 배당됐다. '어려운 문제가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습니까'를 묻는 시간이다. 청취자가 의견을 보내온다. 내가 '비약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썼다. 어떤 순정의 청년이 어떤 여자한테 프로포즈를 했다. 자기는 일단 결혼했었는데 상대가 사망해버렸다. 그래서 예스라고 말 할 수 없다고 하자, 청년은 그런것 개의치 않는다, 봉건사상 따위 뛰어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첫번째 방송이 성공하자 속편을 썼다. 이때의 성우가 최은희.최무룡 이었던가. 이해랑(李海浪).김동원(金東圓)도 나왔었던가. 후일 모두 대성한 사람들이다.

연출을 맡은 것이 '청실홍실'로 한국 최초의 라디오 연속극을 썼던 조남사(趙南史)다. 그의 본명은 조남헌(趙南憲)이었다. '똘똘이의 모험'이라는, 중학생인 구민(具泯)을 주연으로 한 어린이극의 연출자였다. 그는 내 작품에서 성인극으로 성장한 모양새가 됐다.

조남헌과 나는 자주 어울렸다. 갑자기 내 이름 韓雲史의 史자를 따서 조남사라고 하고 싶다고 했다. 내가 구름의 역사라면 자기는 남쪽나라 역사라고 한 것일까. 그 후 헷갈리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여인소극장이 명동에서 연극을 하면 대단한 성황이었다. 이해랑.김동원.황정순 등이 어울리면 문전성시다. 조남사가 하루는 우리도 연극을 하자고 했다. 청막극회(靑幕劇會)라고 명명했다.

나보고 작품을 쓰란다. 나는 무대극을 써본 적이 없었지만 프랑스에서 더 나아가 전세계에서 히트친 '마류우스'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번역했다. 대단히 고생했으며 무대에 올려놓는데 돈도 필요했다. 모 부처에서 돈을 취급하는 동창 송재만한테 백만원을 꾸게 되었다. '마류우스'는 최무룡, '세자르'는 장민호, '화니'는 숙대 재학중인 이인옥(李仁玉), 연출은 김묵(金默).민구(閔九).오사량(吳史良) 등이 찬조하여 명동 시공관에서 막을 올리니 구름 떼처럼 몰려올 줄 알았던 관객은 어디로 간 것일까. 하루는 이 방면 베테랑 김영수 선생이 와서보고 무릎을 치며 "잘한다! 잘한다!"했는데 결과는 비참한 꼴이 되었다. 마지막날, 나는 정종 두 병을 사가지고 분장실에 들어가 "수고들 했다! 다음 기회가 있을 것이다" 자위하며 눈물을 닦았다.

이 빚 백만원은 공금이다. 이걸 안갚으면 친구가 크게 다친다. 돈 마련할 길은 하나도 없다. 나는 굳게 한일(一)자로 입을 다물었다.

한운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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