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인터넷 10년] 9. 꿈은 이루어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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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해. 안하면 죽여 버린다!"

"너 나랑 진짜 결혼할라고? ㅡ.,ㅡ"

"누군 너 좋은 줄 아냐!? 곰 대가리야! 너 나랑 사귀는 거 소문내고 다니면 가만 안 둬!"

"누가 너랑 사귀는데?! -_-^"

"나도 역겹지만 -_-^ 니가 내 입술 덮친 거 본 애들 네 명이나 있잖아!"

"헉. 뽀뽀가 대수냐. 나 사귀는 사람 있어(있긴 쥐뿔도 없음)."

"그건 내가 상관할 바 아닌데. ㅡㅡ* 누가 니 좋아한대냐?"

"금 왜 사겨!"

"뽀뽀했으니까! -_-^ 난 말했다? 전화 안하면 죽어."

얼빠진 나랑 경원일 뒤로 하고 그들은 휘적휘적 떠났다. 이렇게 보니까 지은성 그놈 키가 제일 컸다. 그놈들이 시야에서 멀어진 걸 확인한 뒤 난 소리를 질렀다.

"우오오오옥! >,,<"

갑자기 웬 채팅이라도 하느냐고? 10대 네티즌들에겐 낯익은 귀절일 게다. 바로 지난해 출판계에 '귀여니 신드롬'을 일으킨 소설 '그놈은 멋있었다'의 일부다. 지난 2001년 당시 여고 2학년이었던 작가 귀여니(19.본명 이윤세)가 인터넷 사이트 다음(daum)의 유머 카페에 연재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이 소설은 지난해 책으로 출간돼 서점가에서 또 한번 돌풍을 일으켰다. 이를 원작으로 한 송승헌.정다빈 주연의 동명 영화도 만들어져 곧 개봉될 예정이다.

귀여니는 이 소설 뿐 아니라 '늑대의 유혹''도레미파솔라시도' 등 인터넷에 연재했던 다른 소설들도 오프라인으로 출간해 성공했다. 그로 인해 지난해 성균관대 예술학부에 특례입학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10년 후 소설이나 시나리오 작가가 돼 있기를 희망한다는 그녀로선 인터넷을 통해 확실한(!) 기회를 잡은 셈이다.

이제 인터넷은 신인 작가들의 중요한 등용 수단으로 떠올랐다. 일간지나 문학전문지들이 주최하는 신인문학상 등도 여전히 있지만 그 열기는 많이 식었다. 반면 인터넷은 단순히 '원서 접수 창고'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네티즌들에게 컨텐츠를 직접 보여주고 흥행성을 검증받아 오프라인으로 진출할 기회를 얻는 공간으로서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특히 순수문학보다는 영화.시나리오 작가를 꿈꾸는 이들이 인터넷 소설 쓰기에 더욱 적극적이다. 실제로 PC통신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엽기적인 그녀'나 인터넷 소설이 원작인 '동갑내기 과외하기'가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면서 영화사들은 경쟁적으로 인터넷 작가 끌어들이기에 나섰다. 이미 영화화됐거나 현재 영화화가 진행 중인 인터넷 소설은 '내 사랑 싸가지''늑대의 유혹''내사랑 일진녀''삼수생 일기' 등 10여편에 달한다.

지난해 큰 인기를 끈 MBC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나 '1%의 어떤 것'도 인터넷 연재 소설이 원작이었다. '옥탑방 고양이'를 쓴 김유리씨는 한 인터뷰에서 "돈 없는 무명 작가들에게 온라인을 통한 작품 발표는 독자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라면서 "작가와 독자간의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쉽다는 점도 작가 지망생들이 인터넷을 찾는 이유"라고 밝혔다.

도서대여점의 등장 이후 불황을 면치 못하고 있는 만화 출판계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신인들의 등용문 역할을 해온 전문 잡지들이 속속 폐간되면서 그 자리를 인터넷이 대신하고 있다. 지난해 10월부터 다음커뮤니케이션(http://www.daum.net)에 연재돼 하루 평균 페이지뷰 200만명을 기록하는 등 네티즌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던 만화가 강풀의 '순정만화'가 첫 장편 만화집으로 출간됐고, 디시인사이드(http://www.dcinside.com) 등에서 인기를 끌어온 핫도그의 '곰씨와 오리군'도 최근 만화책으로 나왔다. 역시 디시인사이드 등에 한컷 카툰으로 연재돼 많은 클릭수를 기록하고 있는 '고구마군'도 오는 5월쯤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사실 인터넷이 소설이나 만화계의 신인 등용문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은 연예계나 대중음악계와 비교한다면 오히려 늦은 편이다. 1990년대 말 이미 조PD라는 '사이버 가수'가 가요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지난 98년에 등장한 그는 방송 대신 인터넷에 MP3 음악파일을 띄워 네티즌들을 사로잡았다. 오프라인 앨범을 낸 것은 그 이듬해인 99년 1월이었다.

이렇게 인터넷이 대중문화 컨텐츠 생산자들의 새로운 등용문이 되고 있는 현상은 기회의 확대란 측면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네티즌들 사이에서의 인기를 거의 절대적인 평가 기준으로 등단한 이들에 대해 기존 문화계의 시선은 차가운 편이다.

특히 초등학생까지 작가군에 가세한 인터넷 소설은 언어파괴의 주범으로 지적되며, 이우혁 등 기존 문단의 냉대를 받아온 PC통신 작가들로부터도 비난을 받고 있다. 예를 들어 '그놈은 멋있었다'를 보자. 내용은 지극히 단순하다. 평범한 여고생이 우연히 한 남학생과 키스를 하게 되는데, 거친 듯한 태도와 달리 순수하면서 키 크고 잘 생긴 이 남학생과 결국 사랑에 빠진다는 줄거리다. 기존의 하이틴 로맨스와 다른 점이라면 10대 소녀가 경험을 토대로 직접 쓴 생생함 때문에 다른 10대들의 공감을 더욱 쉽게 얻었다는 것, 그리고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기성세대는 이해 못할 암호들과 유머로 가득하다는 점이다.

특히 통신용 이모티콘(*-_-*, +_+와 같이 기호들을 조합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나, "안냐세여"(안녕하세요), '걍'(그냥) 등의 네티즌식 표현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은 기존 문학계로부터 "아무리 대중소설이 처음 등장했을 때 저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지만 이건 소설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쓰레기"라는 등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불황 속에 위험부담을 안고 싶어하지 않는 출판계나 음반업계로선 인터넷에서 흥행성을 검증받은 이들을 향해 유혹의 손길을 뻗치는 것이 당연하다.

이에 대해 출판 평론가 이권우씨는 "권위있는 사람에 의해서만 등단할 수 있다는 관례를 깸으로써 '문화권력'으로부터 자유로와진 측면이 있다"면서, "하지만 인터넷에서의 인기 컨텐츠들은 대개 정통 미학적 입장에선 충실하지 못한 편이며, 인터넷에선 무료로 공개되던 컨텐츠가 출판을 통해 유료화되면서 이익을 남기고자 하는 욕망과 결합하다보면 독자의 감수성에만 호소하는 작품들이 나오기 쉽다"고 문제점을 지적했다.

즉 정치 민주화가 대중 선동주의.포퓰리즘으로 흐르기 쉬운 것처럼 정신.문화 영역의 민주화 역시 같은 길을 밟을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씨는 "인터넷 소설이나 카툰들이 네티즌들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짚어내면서 위안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무시할 수 없다"면서 "위안 그 이상의 것이 담겨 있느냐 하는 비판을 하기에 앞서 기존 문화계가 이러한 장점을 적극 수용해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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