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빨리빨리病과 늑장구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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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치과의사에게 물으면 그나라 국민성의 편린을 쉬 읽을 수 있다한다.이를 뽑아야 한다는 진단이 내려졌을 때 미국인 환자는 아프냐고 묻는다.일본인은(치료비가)얼마냐고 묻는다.한국인은 얼마나 걸리느냐고 묻는다.단숨에 이를 뽑아낼 수 있 는가의 속도가중요하다.그 망국적「빨리빨리병」때문에 민족이 얼마나 수난을 겪고 있는지 스스로 개탄하면서도 이것만은 빨리 치유되지 않는다.
서울 우면산 기슭에 자리잡은 예술의 전당은 문화 한국이 내세울만한 기념비적 건축물이다.그 안에 들어앉은 오페라하우스가 문을 열 때였다.대역사가 채 마무리되지 않아 작업원들이 쿵쾅거리며 작업을 벌이고 있는데 한쪽 무대에서는 가수들이 나와 리허설을 하고 있었다.문명사회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서두른 이유는 빤했다.VIP를 모시고 치적(治績)테이프를 끊어야 했기 때문이다.준공일정에 맞춰 개관 테이프가 끊기는 것이아니라 매우 중요한 사람의 커팅 일정에 맞춰 공사를 마쳐야 했다. 진시황(秦始皇)릉에서 엄청난 문화재가 쏟아져 나온지 수십년이 흘렀다.성마른 한국기자가 중국의 옛도읍 시안(西安)을 찾아 복원작업이 언제 끝나 공개되느냐고 묻자 병마용(兵馬俑)박물관측은『백년쯤 걸릴 것』이라고 천연스레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얼마전에 벌어진「만주는 우리땅」촌극만 해도 그렇다.우리가 중국과 어렵사리 국교를 튼지 몇년이 되었다고 고구려 고토(故土)를 찾는답시고 수선을 떨다 리펑(李鵬)총리한테 따끔한 말총만 얻어맞고 머쓱해 돌아왔다.
서울 삼풍백화점 참극을 지켜보노라면 한국인의 급한 성미가 역력히 드러난다.당초 사흘만에 구조작업을 마치려 했다니 듣기만 해도 끔찍하다.
시시각각 전세계에 비쳐지는 날림공화국의 처참한 모습을 냉큼 치우고 싶은 누군가의 빠른 머리회전이겠으나 이나라의 「붕괴지수」는 이미 세계인이 불감증에 걸릴만큼 높아 있다.
오클라호마 폭파빌딩은 그 일그러진 모습을 한달동안이나 그대로둔채 구조와 조사활동을 폈다.경찰 저지선이 삥 둘러쳐져 불필요한 인원은 얼씬도 못했다.재난 유형별로 사전에 준비된 장비를 지닌 전문요원이 뛰어든다.구조.응급.통신의 삼각 체계가 소방서장 지휘아래 일사불란하다.
되도말도 뛰어들어 수천명이 뒤엉킨 두더지식 구조속에서는 실낱같이 부지하고 나온 생명의 불마저 꺼뜨릴 수 있다.아수라장속에서는 어디서 들려올지 모르는 신음소리를 잡아낼 예민한 장비가 제구실을 할 수 없다.
우리의 경우 정작 빨라야할 재난 구조는 늑장이고 손발이 안맞는다.그토록 숱한 대형사고를 치렀는데도 재난 대응 시나리오가 용수철처럼 튀어나오지 못하는가.피투성이가 되어 들것에 실려 나오는 판에 음식이 벌려있고 도둑떼와 가짜 유족까지 설치다가 난투극을 벌이는 모습,슬프고 분하고 부끄러움의 극치였다.
건설이 있는 곳에 붕괴가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외면한채 살아왔다.세운 것은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무너지지 않게 버티는 노력에 게을렀다.방재(防災)투자에 인색했다.정보통신에만 우수인력이 몰리고 건설은 노가다의 세계로 동댕이쳐 있었 다.
겉만 번지레한 백화점처럼 건설없이 정보가 온전하겠는가.입만 열면 감리 감리 하지만 누가 감리를 하는가.감리인원은 턱없이 부족하고 권한이 없다.엉성한 방재요원의 훈련도 시급하다.소방서장의 권한도 커져야 한다.
한해 붕괴희생자수가 베트콩의 테트(구정)공세로 월남전이 피크에 달했던 전쟁터의 희생을 능가하고 있음을 일깨우고 싶다.붕괴와의 전쟁에서 이기지 않으면 아무 것도 세울 수 없다.더이상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
〈칼럼니스트.政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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