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므 파탈의 필수 아이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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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호 39면

남자만의 시계? 웃기는 표현일 수 있겠다. 브라이틀링을 남자만 쓰라는 법은 없다. 티베트에서 만났던 미국인 여성 사진가 수전 파이퍼는 아버지의 유품인 ‘네비타이머’를 차고 있었다. 커다란 문자판에 복잡하게 들어찬 고도계와 타이머 기능은 한눈에 보기에도 선수의 물건 같았다. 예쁘장한 얼굴에 자그마한 체구를 지닌 그녀는 멀리서 보면 브라이틀링 시계만 들어왔다.

윤광준의 생활명품 이야기-브라이틀링 시계

난 그녀 시계의 진가를 인정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브라이틀링은 120여 년 전 리온 브라이틀링이 세운, 전문가를 위한 용품 회사로, 그의 시계는 항공 매니어 사이에 절대적 인기를 차지하고 있으며 한때 이탈리아 공군의 지급품이었다는 둥. 시계로 비롯된 관심이 마음을 움직였던지 지프를 빌려 동행하자는 제안을 먼저 한 쪽은 그녀였다. 이후 행적은 상상에 맡긴다.

기계식 시계가 전부였던 시절 항공 운항을 위한 계산(거리 환산과 평균 속도 측정) 기능을 탑재했던 브라이틀링이다. 디지털 전성시대인 지금 보면 우스워 보일지 모른다. 당시 이러한 기능은 첨단이었다. 많은 조종사가 자신의 시계 하나에 의존해 비행기를 몰았던 시절을 잊으면 안 된다.

1952년에 만들어진 네비타이머는 항공 타입 시계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성능과 디자인이 보강되었지만 원형의 고수는 지금껏 이어진다. 상표로 쓰는 날개와 닻에 담긴 상징의 자부심은 퇴색되지 않는다. 세월의 변화에 대응하는 자신감이 없다면 전통의 고수는 힘겨운 고집일 뿐이다.

여러 기능을 담은 시계 안의 작고 정교한 문자판은 브라이틀링의 상징과 개성이며 전통이다. 이젠 너무 흔해져 무감각해진 크로노그래프 시계의 원형을 여기서 찾는다 해도 무리는 없다. 기능으로 출발해 특화된 개성으로 자리 잡은 브라이틀링의 존재감은 남자를 위한 아이템으로 돋보인다.

수전 파이퍼와의 인연을 계기로 브라이틀링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주변의 시계 매니어로부터 들은 예찬론까지 겹쳐 견물생심은 당연지사다. 실물을 보게 된다. 비행기 탈 일이 없는 내게 복잡한 기능은 별 의미가 없다. 브라이틀링의 진가는 기계식 무브먼트를 사용하는 정통 스위스 시계의 존재감이다.

극도의 정밀함을 담은 시계의 외형은 완벽을 향한 인간정신의 표현이었다. 케이스에 가려 보이지 않는 스프링이나 기어 부품에 담긴 첨단과학과 경험의 동거는 성능으로 확인된다. 브라이틀링은 시계의 프로들이 타 분야의 프로에게 보내는 교감의 메시지였다.

여자들을 파탄으로 끌어넣는 남자인 옴므파탈(Homme Fatale)의 필수 아이템이 명품시계라 한다. 돼지나 개나 명품 시계 하나쯤 다 가지고 있는 판국에 제대로 된 옴므파탈 행세는 어렵겠다. 하지만 브라이틀링 때문에 파탄을 각오하는 여자가 있다면 나도 옴므파탈이다.


윤광준씨는 사진가이자 오디오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체험과 취향에 관한 지식을 새로운 스타일의 예술 에세이로 바꿔 이름난 명품 매니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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