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에서 다시 시작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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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동남아 출장에서 막 돌아온 기업체 임원인 한 친구가 전화를 걸어와 이번 칼럼에선 다른 말도 필요없이 그저 커다란 물음표 하나만 찍고 말라고 충고했다.더이상 무슨 말을 할 게 있느냐는것이었다.그곳 언론에 연일 시간마다 계속 보도되 는 고국의 어처구니없는 참사소식에 낯이 달아오르는 것은 둘째고「이게 국가인가?」하는 절망적인 의문에 더 참담한 심정이었다는게 소감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새롭게 할 말도 찾기 어렵다.모든 것은 이미다 말했다.아현동가스폭발사고,성수대교붕괴,또다시 대구가스폭발사고,그리고 마침내 삼풍백화점붕괴-.사고의 시기와 장소.내용은 달라도 문제의 본질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외국언론들도 너무도 같은 성격의 사고연속에 새 말을 찾지 못하고 있다.「경제성장병」「보다 빨리,보다 싸게,보다 크게」 「사고공화국」 「CAN DO공화국」 「만기도래한 미지급청구서」…. 최근 2년반동안 우리들이 연이어 겪은 어처구니없는 대형참사때 이미 지적했던 말들을 다시 되뇌고 있다.
수십년 계속된 지리한 독재정치에도 진저리를 쳤지만 그렇게 사고를 겪고도 문제가 무엇인지,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아니 위기를 위기인줄도 모르는듯한 무지.무감각.무능에도 이젠 정나미가 떨어진다.
정부는 한때 90%의 지지를 보였던 국민이 언제 그랬더냐싶게등을 돌려버린데 대해 섭섭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그 숱한「과감한 개혁」을 그새 잊었느냐고 불만이다.그러나 등을 돌려버린 사람들의 입장에서 말하란다면「개혁을 그렇게 하는 것이요?」이거나「시작인줄 알았더니 어느새 끝이요?」하는 것이다.이번 지방선거결과는 바로 이런 두 종류 불만의 합작품이다.
국민이 깜짝깜짝 놀랄만한 개혁만을 원하는건 아니다.과속으로 달려와 나라가 웃자란 풀처럼 돼 있다면 지반을 단단히 다지고 거름을 줘 제대로 크게 하는 것도 훌륭한 개혁이다.부실기업을 물려받았다면 그 부실의 원인을 찾아 건실하게 만드 는 게 바로개혁이다.
성수대교붕괴때도,대구참사때도 『그토록 여러번 지시를 했는데…』가 정부쪽에서 나온 소리였는데 이번에도 또『그동안 그토록…』이다. 이제는 지시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 때도 되지않았는가.개탄만 거듭할 것이 아니라 지시해도 안되는 원인을 알아내야 한다.누군가의 말대로 알아야 보이고,보여야 고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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