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비타협과 보복, 그리고 탄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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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 탄핵소추가 국회에서 가결돼 대통령 업무가 잠정 중지되었다. 충격적인 사태가 아닐 수 없다. 국내외로 산적한 현안을 앞에 두고 나라꼴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국민은 그 어느 때보다 불안하다. 과연 대통령이 탄핵당할 만한 중대한 실정을 저질렀는가? 과거 군사정권이나 유신시대에 힘으로만 밀어붙이던 권력의 관행을 보듯 표결 과정이 섬뜩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국이 극단적인 파국을 맞기까지 원인 제공을 돌아보면 그 이면에는 지난 1년 동안 '국론의 분열'로 국민적 통합과 화해를 이룩해내지 못한 갈등의 골이 너무 깊었다.

정치적 배경이 없는 서민 출신으로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젊은 나이로 대통령에 당선된 뒤 1년 동안 盧대통령은 부패한 낡은 정치를 청산하자며 줄곧 개혁을 주창해 왔고 이를 실천했다. 그러나 그분의 개혁정치 실천이 속도 조절을 고려하지 않은 급진성으로, 집권 초기부터 보수세력의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집권의 호기를 놓친 거대 야당이 무슨 말을 못하랴. 그러나 그분의 표현대로 '잘못이 있다면 당선된 원죄'임에도, 국민의 선택으로 권좌에 올랐다. 그렇다면 승자로서 패자에게 아량을 보여 '차떼기' 하는 미운 자식도 자식이니 이를 쓰다듬어 국가 운영의 동반자로서 정치개혁 동참을 유도해야 했다. 면박만 주고 내치니 사사건건 시비를 걸 수밖에 없었다.

탄핵 정국을 맞게 된 결정적 원인은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민주당을 지역당으로 몰아 너무 빨리 고립시킨 결과였다. 설령 개혁에 걸림돌이 되었더라도 그들은 대통령 당선을 위해 혼신으로 뛰었고, 그들 표밭의 '노풍'으로 결정적 도움을 받은 게 사실이다. 그리고 여당이 소수당으로 전락한다면 국정 운영에 많은 애로가 있을 것임을 감안할 때 그들이야말로 우군이므로 정치개혁에 동반자로 품고 가야 옳았다. 대통령 임기 5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젊은 피'로 개혁을 차근차근 추진하며, 자중지란으로 여론의 지탄을 받을 때 천천히 갈라설 수도 있었다. 결과, 민주당은 한나라당보다 앞장서서 대통령 공격에 나섰고, 그들이 먼저 대통령 탄핵소추를 발의했다. 여기에는 대통령으로서의 자격이나 대통령 공백시 야기될 국가적 혼란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기 전에 배신감에 따른 보복성 한풀이가 짙었다.

결과가 이렇게 된 마당에, 盧대통령의 '말'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두고 싶다.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해 성공한 자의 장점은 자기 신념의 추진력에 있다. 비켜가거나 타협하지 않고 정면승부를 건다. 그 솔직성.정직함은, 내가 옳은 일이라 믿을 때 어떤 비바람도 헤쳐 나와 오늘에 이르렀기에 앞으로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그 점이 그분의 성공을 도왔다. 어떤 자리에서나 거리낌없이 자신의 속내를 토로하다 비판받은 막말 실수도 소탈한 서민성과 정직성의 결과이므로 역대 대통령의 권위주의 속성을 벗어난 측면에서 국민은 이를 신선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자신감이 지나쳐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듯 여러 차례 정치적 생명에 정면승부를 건 점은 반드시 옳다고만 볼 수 없다. 국민투표로 재신임을 묻겠다, 불법 선거자금이 한나라당보다 10분의 1을 넘으면 현직을 내놓겠다는 소신발언은 한 국가의 운명을 책임진 분의 할 말이 아니었다. 국민이 대통령으로 선택한 이상 5년간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할 책임의 다짐이 중요하지,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솔직한 자신감은 경솔했다. 3월 11일 담화 발표도 '설령 대통령직을 그만두더라도 선거법 위반을 사과하지는 않겠다'는 대쪽 천명이 결과적으로 국회 탄핵소추 통과라는 결과를 빚었다.

이제 지난 잘잘못을 따지기에는 늦었다. 국민이 이 난국을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하느냐가 문제다. 보.혁 갈등의 첨예한 감정적 대결은 중지돼야 한다. 무엇보다 난국을 수습할 정치가들의 책임있는 자세가 중요하다. 국가의 장래를 생각해서 현 사태를 악화시킬 무책임한 행동이나 발언 역시 자제돼야 한다. 이런 때일수록 서로가 상대를 인정하는 화합과 상생의 길을 모색해 고난을 극복해온 우리 민족의 저력을 다시 한번 보여줘야 한다.

김원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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