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Story] 총선이 급했나 … 일단 멈춘 ‘성장 행진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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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싸우지 않아도 되겠군….”

한국은행의 한 간부는 24일 원-달러 환율이 5.9원 급락해 세 자릿수인 997.2원으로 마감하자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그는 전날 이명박 대통령이 “성장보다는 물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 것이 믿기지 않았다. 새 정부는 출범하면서부터 ‘성장 우선’을 한결같이 주장했기 때문이다.

21일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총수요를 관리하는 통화관리로는 물가가 오르는 것을 막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인해 물가가 오르기 때문에 금리를 유지해야 소용없다는 뜻이었다. 차라리 이럴 때는 경기 회복에 전념해 금리를 내리는 게 맞는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대통령의 한마디에 이런 기류가 확 바뀌었다. 성장률 6%를 맞추기 위해 성장 드라이브를 걸던 새 정부가 물가 안정에 무게를 두기 시작한 것이다. 경제정책도 상당 부분 변화가 불가피하다.

무엇보다 당분간 금리를 내리기 어렵다. 금리를 낮추면 시중에 돈이 풀려 물가가 더 불안해지기 때문이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는 지난해 8월 콜금리를 5%로 조정한 뒤 7개월간 제자리에 묶어 놓고 있다. 이 대통령의 발언으로 당분간 금리를 낮출 이유가 없어졌다.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이날 채권시장에선 시중 금리가 급등했다. 3년짜리 국고채 금리는 전날보다 0.11% 오른 5.29%로 마감했다.

아이투신운용 김형호 채권운용본부장은 “새 정부의 정책기조가 물가 쪽으로 기울면서 당분간 금리 인하가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으로 채권 금리가 올랐다”고 말했다.

물가 안정을 중시한 대통령의 발언에는 원-달러 환율이 더 이상 오르는 것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뜻도 담겨 있다. 환율은 새 정부 취임 이후인 지난달 29일부터 고공행진을 했다. 13거래일간 무려 75원이나 올랐다. 최중경 기획재정부 차관은 “고평가된 원화가 정상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며 환율 상승을 묵인하는 듯한 발언도 했다.

하지만 환율 상승은 수입품 가격 상승으로 이어져 국내 물가를 더욱 불안하게 했다. 외환 당국은 어쩔 수 없이 이달 18일 10억 달러 이상을 시장에 풀어 환율이 더 오르는 것을 막았다. 물가 때문에 정부가 환율이 더 오르는 것을 막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24일 원-달러 환율은 6거래일 만에 1000원 밑으로 내려갔다.

정부는 재정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는 정책도 쓰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성장이 우선순위에서 밀리면서 올 6% 성장도 쉽지 않고, 고용 부진도 이어질 전망이다. 이미 지난달 취업자는 전년 동월에 비해 21만 명 늘어나는 데 그쳤다. 정부 목표치인 35만 명에 한참 못 미쳤다.

그럼에도 정부가 물가 안정을 내세우기로 한 것은 보름 앞으로 다가온 총선이 상당 부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가뜩이나 여당의 분란으로 지지도가 떨어지는데 물가마저 뛰면 유권자들로부터 외면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김주형 LG경제연구원장은 “대외 여건 불안으로 성장세가 낮아질 전망”이라고 말했다. 현대경제연구원 유병규 본부장은 “국내 경기가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종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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