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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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제2부 불타는 땅 떠난 자와 남은 자(15) 『너 지금 무슨말을 하는 거냐?』 치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렇지 않습니까.이제는 늙어서 일어서지도 걷지도 못하는 소같이 되어 있던 조선입니다.일본과의 합방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그런 방법 이외에는 임금님의 목숨을 부지할 방법조차 없었던 때입니다.러시아도 청국도 일본에 무너진 판인데 대동아공영권을 짜서 서양의 열강에 맞서자는 게 어디가 잘못되어 있습니까?』 『그게 네 생각이란 말이냐?』 『네.조선만 생각해도 그렇습니다.합방으로부터 그 후를 비교해 보십시오.석탄의 생산량이 얼마며기타 철광석의 채광이 얼마입니까.신발공장 하나 제대로 없던 우리들입니다.그런데 숫자를 늘어놓지 않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철로 하나 깐 것도 다 일본이 한 일입니다.』 『내 하나만 묻겠네.』 『네 말씀하시지요.』 『그래서? 그 석탄을 캐낸게 조선사람 따뜻하게 불 때게 하려고 캐낸 석탄이던가? 그 철길 깐 게 조선사람 편하게 다니라고 깐 길이더란 말인가? 자네야말로 젊은 사람이 어찌 눈이 멀어도 그렇게 소가죽을 뒤집어 쓴듯 보지를 못하나? 』 『기간산업이란 나라의 동맥입니다.그걸누가 건설했느냐를 말하는 겁니다.그나마 일본과 합방을 하면서 그렇게라도 나라의 틀을 잡지 않았느냐는 거지요.』 이런 밸도 쓸개도 없는 놈.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면서 치규가 빈 장죽을 들었다.아들의 동무놈과 무슨 싸움을 하겠는가.스스로를 달래며 치규가 느릿느릿 말했다.
『자네 생각해 보게나.그놈들이 석탄을 캘 때,그놈들이 방직공장에서 옷감을 짤때…그게 이 조선땅의 백성과 무슨 상관이 있었단 말인가.가렴주구라는 말도 여기는 당치도 않네.그래서,일본이철길을 깔지 않았다면 지금도 조선 백성은 걸어다 닐 거라 그말아닌가.그러나 이 사람아.걸어다녀도 내 나라 땅에서 내 백성이걸어다니는 거네.반만년의 민족이네.지금 자네가 어디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그래서 제가 하는 말입니다.그 공장을일본이 떠메고 가겠느냐고요.철길 깔아놓은 거 파들고 가겠느냐 그겁니다.일본이 만들었다 해도 그건 조선의 겁니다.거기서 왜 억지로 눈을 돌리려 하십니까? 귀축미영에 먹혔다면 어림도 없을이야깁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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