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대통령 재신임과 총선 연계 안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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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노무현 대통령의 어제 기자회견은 실망스러웠다. 우리는 파국으로 치닫는 탄핵정국의 난기류가 기자회견으로 마무리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러한 난국이 해소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복잡하고 꼬이게 만들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우리는 대통령이 국정운영의 최고책임자로서 여야와 국민 모두를 아우르는 성숙한 리더십을 보이기를 기대했다. 탄핵, 측근.친인척 비리, '10분의 1' 발언 등 얽히고 설킨 실타래를 끊어버릴 수 있는 결단을 기대했다. 하지만 회견에서 총선과 자신의 재신임을 연계시킴으로써 오히려 불씨만 더 키운 회견이 됐다. 형식적으로는 사과를 했지만 구구절절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해 큰정치의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盧대통령은 "총선에서 나타난 국민의 뜻을 심판으로 받아들여 상응하는 정치적 결단을 내릴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이번 총선의 결과를 재신임과 연계시키겠다는 뜻인데 우선 이러한 연계가 과연 합법적인가 하는 문제부터 나온다. 국민투표 조항에는 재신임 조항이 없다. 따라서 재신임을 국민투표로 묻는 것은 위헌이기 때문에 대통령의 재신임 문제는 탄핵이나 사임 길밖에 없다는 마당에 총선의 결과를 대통령에 대한 재신임 지표로 사용하겠다니 말이 안 된다. 총선에 대통령의 진퇴 문제를 내걸면 결국 총선이 국정 안정이냐, 혼란이냐의 선택을 국민에게 강요하는 절차로 변질될 우려가 크다. 결국 국민의 안정 희구 심리를 총선에 이용하겠다는 의도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盧대통령은 "구체적 내용은 입당하는 시기쯤에 밝히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재신임이 총선에서 과반수가 되어야 하는지, 100석이 되어야 하는지, 그 기준이 대통령 마음먹기에 따른 것인데 이런 자의적인 재신임이 또 어디 있는가.

불법 대선자금 규모에 대한 盧대통령의 해명도 구차하다. 대선이 끝난 뒤 측근들이 받은 돈을 제외하면 한나라당의 10분의 1에 못 미친다고 했다. 대통령이 기자회견장에서 일일이 액수를 계산하는 모습도 대통령답지 못했다. 오히려 깨끗이 사과하고 이번 일을 계기로 털고 넘어가자는 통큰 모습을 보여주었어야 했다.

불법 대선자금을 거둔 선거 참모들에 대해서는 "법을 어겼지만 선거를 위해 노력한 일이고, 개인적으로 착복하거나 치부하지 않은 것은 매우 감사하다"고 했다. 친인척 비리와 관련해서도 당사자들의 애로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청와대의 관리가 어렵다고 하소연하는 모습은 과연 대통령이 민심을 알고 있는지 다시 한번 묻게 만든다. 회견을 지켜보는 국민의 그 소중한 시간을 푸념과 하소연으로 낭비해서야 회견의 본뜻이 무색해진다. 대통령이라 하여 소중한 지상파 방송을 이렇게 사용해도 되는 것인가. 각 방송사는 앞으로 대통령에게만 일방적인 시간을 할애할 것이 아니라 야당에 대해서도 비슷한 비중으로 반론의 기회를 주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