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상유(尙遊)'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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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장대송(1962~) '상유(尙遊)' 전문

멀리 내려다보니 산들이 겹겹이 서 있다
계곡 사이에
계단식 논이, 논가에는 집이 두 채 있다
먼저 지나쳐온 골짜기들보다 푸근하다
오늘따라 골짜기 한 가운데로 해가 지고 있다
눈을 감아야 할 것 같다



나그네에게 행복한 일은 아직 걸을 길이 남아 있음이다. 산을 넘고 강을 따라 걷다가 다시 언덕을 넘고 구름을 따라 걷다가…. 영마루에서 문득 해는 지고…. 얼마나 많은 해넘이를 맞이해야 생은 저 산능선처럼 깊고 고요해질까…. 감았던 눈 비벼 뜨고 산마루 돌면 문득 마주치는 마을.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때 아닌 닭울음 소리가 들리고…. 마을 안길은 밥 뜸들이는 냄새로 더없이 평화로운데…. 이르는 곳마다 마주치는 이 상유(尙遊)의 시간들. 어떤 죄의 흔적 속에도 별밭을 띄우는 깜깜한 밤의 서향(瑞香)이여. 길이 남아 있음은 나그네에게 운명보다 따스한 일이다.

곽재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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