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通노조 장기농성사태를 보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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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서울 명동성당과 조계사가 한국통신 노사문제로 연 2주일째 뉴스의 초점이 되고 있다.
사태는 한 회사의 노사문제가 전혀 엉뚱하게 국가와 종교,공권력과 종교권력의 대결양상을 파생시켜 자칫 잘못하면 본말이 뒤바뀔지도 모를 불길한 예감을 갖게한다.
우선 나는 폭압적인 유신체제와 군사독재정권 시절 명동성당이 민권운동의 메카로 이나라 민주발전에 기여한 공헌을 평가하는데 조금도 인색할 필요가 없다는 전제를 분명히 해두고자한다.그러나가톨릭과 불교가 오늘의 사태와 군사정권하의 저항 운동을 같은 틀속에 넣는데 대해서는 선뜻 동의할 수 없다.
가톨릭교회는「긴급 피난권」을 인정해온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살인범까지도 성역(聖域)으로 긴급피난 해오면 교회를 통해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며 의.식.주를 제공한다.
교회의 범법자 보호는 양심과 인간 존엄성이라는 지평(地平)에서 聖과 俗이 다함께 공인할 수있는「정의」에 입각했을 때만이 정당성을 갖는다는게 상식이다.그리고 은닉과 보호는 전통적으로「개인」이고「비공개」가 원칙이다.
가톨릭 2천년 역사안에서 깊은 감동을 주는「긴급 피난권」에 얽힌 일화들이 무수히 많다.2차대전후 독일재건의 기수였던 아데나워 前서독총리도 히틀러의 나치정권에서 박해받을때 일시 성당에피신해 보호받은 일이 있다.
우리에게는 군사정권시절 부산 美문화원사건에서 원주성당의 최기식(崔基植)신부가 범인으로 지목된 김현장(金鉉奬)씨를 숨겨준후구속돼 세속 실정법의 심판을 받은 사례가 있다.또 영화속의 이야기지만 성당에 긴급 피난한 살인범을 보호해준후 범인의 죄를 스스로 뒤집어쓰고 세속법의 사형을 받은 가톨릭 신부 이야기에서예수의 십자가 대속(代贖)에 비유할만한 경건한 감동을 받는다.
교회전통은 세속 실정법이 인간존엄을 파괴하는「악법(惡法)일 때는 종교적 용서로 사회적 죄과까지를 면죄시킨다」고 주장한다.
이런 경우는 세속의 양심도 공감하면서 성역에 대한 존경을 아끼지 않는다.
문제는 정의와 불의(不義)를 가릴것없이 세속법을 초월해 범법자 누구나를 성역과 성직자는 보호해 줄 수 있느냐는점이다.
또 합헌적 공권력에 맞서는 집단적인 복수의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보호하면서 성직자가 사태 전면에 나서는 것도「사회구원」이라는 신학적 명분으로 무조건 정당화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과격한 신학노선에서는「폭력」을 수용하는 혁명까지를 외치고 있긴하다.
그러나 교회나 사찰이 숨쉬고 있는 곳은 지금,여기라는 세속현실이다.따라서 종교가 사회제도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는한 정의로운 국법질서나 사회법을 언제나 초월 할 수만은 없다고 봐야할 것같다. 명동성당은 지난 88년 D그룹의 한 회사 노조간부들이투쟁을 위해 입성했을때 잠시 보호하다가 성당을 정치투쟁의 장소로 사용할 수 없다며 자진철수시킨 일이 있다.문제의 해결은 오늘의 상황이 유신체제나 5共 군사독재때와는 다르다는데서 부터 출발해야할것같다.오늘의 우리 헌법은 국민동의와 여야합의를 거쳐제정된 당당한 민주헌법이다.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를 거부하지 않는 종교라면 마땅히 헌법을모태로 하는 민주체제 수호를 위한 최소한의 국법질서는 존중해야한다. 한통(韓通)노사 분규에서 명동성당과 조계사는 나름의 고뇌와 속사정을 안고있을지도 모른다.그래도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한다. 좁은 의미의 성역인 예배공간및 법당을 벗어난 경내의 천막 농성과 공공연한 신앙외적 활동을 더이상 옛 악몽의 날들에 편입시켜 동일한 맥락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오늘의 우리시대 흐름은 불의한 시절 공권력과 종교가 대결하던 참담한 저항 운동을더이상 바라지도 않는다.
명동성당과 조계사는 시대를 앞서는 선지자적 혜안(慧眼)으로 결단을 내려 오늘의 한통 노조사태가 마무리되도록 이끌어주길 거듭 촉구하고 싶다.명동성당과 조계사는 더이상 노동운동의 메카가아니다.교회와 사찰이라고 해서 만년설(萬年雪)같 은 고립의 성역일수만은 없지 않은가.이제 교회와 사찰은 공권력 투입의 방임이나 저항에 앞서 양심에 부끄럼없는「자진철수」를 권유해볼수는 전혀없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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