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어머니의 ‘위대한 유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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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에서 어린 아들 버락 오바마를 안고 있는 스탠리 앤 던햄 소에토로. 이 사진은 건강보험 개혁을 주장하는 오바마의 TV 광고에 등장했다.

‘캔자스주 출신의 백인 여성’.

민주당 대선 주자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의 어머니에 대해선 이 사실 외엔 별로 알려진 게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아는 많은 사람이 “오바마는 자기 어머니와 꼭 닮은꼴”이라고 입을 모은다. 다양성을 포용할 줄 아는 폭넓은 사고, 변화에 대한 열정, 약자에 대한 배려심을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오바마도 그의 첫 번째 자서전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Dreams From My Father)』 서문에서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너그러운 분이셨다. 나의 장점들은 모두 어머니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술회한 바 있다.

뉴욕 타임스는 13일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 있던 오바마의 어머니 스탠리 앤 던햄 소에토로의 삶을 조망한 특집 기사를 실었다. 가구 판매상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캔자스·캘리포니아·텍사스로 옮겨 다닌 그는 1960년 하와이 호놀룰루에 정착했다. 하와이대에 입학한 스탠리는 61년 그 학교의 첫 번째 흑인 학생이었던 버락 오바마(오바마의 케냐인 아버지)를 만나 18세의 나이로 결혼했고, 아들 오바마를 낳았다. 그러나 63년 오바마의 아버지가 하버드대 박사과정에 진학하기 위해 하와이를 떠나며 짧은 결혼은 막을 내렸다. 스탠리는 곧 이어 인도네시아에서 온 유학생 롤로 소에토로와 재혼했다. 66년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집권 이후 소에토로가 소환 명령을 받자 그녀는 아들 오바마를 데리고 인도네시아로 따라갔다.

인도네시아에서 현지인들의 삶과 문화에 깊은 감명을 받은 스탠리는 후에 인도네시아 자바섬 전통 공예 연구로 인류학 박사학위 논문을 썼고, 빈민들을 위한 소액대출 사업에 헌신했다. 동시에 자녀 교육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녀는 매일 오전 4시에 오바마를 깨워 등교 전에 통신교재를 이용해 영어를 가르쳤다. 또한 어린 아들에게 정직성, 독립적인 사고, 솔직하게 말하기의 중요함을 누누이 강조했다고 한다.

그러나 두 번째 결혼도 파경으로 끝나자 스탠리는 74년 오바마와 그의 이복 누이 마야를 데리고 하와이로 건너갔다. 그리고 학생으로서 대학원에 다니는 동시에 돈을 벌어 남매를 키워냈다. 3년 뒤 인류학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인도네시아로 돌아가게 된 그는 오바마가 하와이에서 고교를 마치겠다고 하자 어렵사리 이를 허락했다. 이후 각자의 공부와 일 때문에 떨어져 산 두 사람은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다가 방학과 명절이면 함께 모이곤 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스탠리는 미국 국제개발처(USAID)의 고문으로 일했는가 하면, 포드재단이 펼친 여성 일자리 활성화 사업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다 난소암 진단을 받은 그는 하와이로 돌아와 95년 생애를 마쳤다. 오바마는 대선 TV 광고 중 한 편에서 “53세에 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니는 가장 고통스러운 최후의 몇 달을 다시 나으리라는 희망 대신 엄청난 치료비 걱정을 하며 지냈다”며 건강보험 개혁을 주장했다.

오바마와 누이는 화장한 어머니의 유해를 하와이 오아후섬 남쪽 해안에 뿌렸다. 생전에 어머니가 사랑했던 인도네시아를 향해서였다. “내가 저지른 최대의 실수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오바마는 ‘가장 아끼는 소장품’을 묻는 AP통신의 질문에 어머니와의 마지막 추억이 담긴 오아후섬 해안 사진을 꼽기도 했다.

신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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