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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놈, 나쁜 놈, 추한 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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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그제 “이전 정권의 정치색을 가진 문화예술계 단체장들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권에서 코드 인사로 임명된 단체장들이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자리를 지킨다면 “지금껏 살아온 인생을 뒤집는 것”이라는 말도 했다. 유 장관의 발언에 문화부 직속 11개 기관과 34개 산하기관이 발칵 뒤집힌 것은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일부 기관장은 “나는 전문성을 인정받았을 뿐 코드 인사가 아니다”라고 반박한다. 그런 경우도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이 코드 인사를 안했다고 우긴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공모 절차나 추천위원회가 대개는 껍데기에 불과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문화부 산하 한 기관을 예로 들어보자. 재작년에 기관장 임기가 저물어가자 현직 기관장 A와 학계 원로 B, 그리고 이들보다 훨씬 젊은 C가 차기 기관장 직에 지원했다. 임명권은 문화부가 쥐고 있었지만 다들 B가 낙점받거나 최소한 A가 연임될 것으로 예상했다. 막판에 B는 틀림없이 될 것으로 믿고 대학의 석좌교수 제의도 뿌리쳤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 보니 C의 승리였다. C는 진보 진영의 실력자 D가 총애하는 인물이었다. 항간에는 D가 청와대에 직접 전화를 넣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지난 10년간 이런 류의 풍문이 수도 없이 나돌았다. 그러니 누구도 “코드 인사는 없었다”고 우길 수 없다.

기관장 인사뿐일까. 진보 진영에 속한다는 어떤 작가는 클래식 음악 CD를 만들어 정부기관에 납품함으로써 짭짤하게 재미를 보았다고 한다. 친분 있는 사람이 권력을 쥐고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무산됐지만 진보 쪽의 어떤 단체는 서울 중심가의 빈 초등학교 건물을 인수해 대학 비슷한 자체 교육기관을 세우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그들 사이에서는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우리가 접수해 운영하자”는 큼직한 발상도 나왔다. 아마도 참 좋은 시절, 무지개 같은 나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나는 전 정권 시절 임명됐다 해서 싸잡아 “방 빼”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유 장관의 말 중 ‘이전 정권의 정치색을 가진’이라는 표현에 공감한다. 일반 공기업의 정치인 출신 이사장·감사라면 정권이 바뀌는 즉시 물러나는 게 맞다. 하지만 문화예술계에는 전형적인 코드 인사와 전문가 영입 케이스가 다양하게 섞여 있다. 같은 문화예술인 출신이라도 주변에서 납득 못하는 기관장이 있는가 하면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 사람이 있다. 옥석구분(玉石俱焚)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정치색이 흥건해 노무현 정권 아니면 기관장이 될 턱이 없던 사람이라면 당장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노 정권이 아니어도 됐을 사람이나 돼도 이상하지 않았을 사람은 달리 취급해야 한다.

 더구나 문화부 산하 기관들은 자유인이길 원하고 불온(不穩)과 전복(顚覆)을 중요한 본능으로 치는 문화예술 종사자의 모임이거나 지원 단체다. 유인촌 장관이 전 정권처럼 코드에 맞춰 편 가르기 문화정책을 일삼을 작정이 아니라면, 기본적으로 교집합(交集合) 아닌 합집합(合集合)을 지향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에서는 ‘석양의 무법자’로 알려진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추한 놈(The good, the bad, and the ugly)’은 요즘도 TV에서 가끔 방영하는 서부영화의 걸작이다. 새 정부가 적어도 문화예술계에서는 ‘좋은 놈’은 물론 자신과 생각은 좀 다르지만 실력을 인정받는 ‘나쁜 놈’ 과 ‘싫은 놈’도 포용하기 바란다. 그러면 보너스로 동종교배의 폐해가 문화계에 번지는 일도 막을 수 있다. 실력이라고는 오로지 정권에 빌붙어 자리와 돈을 챙기는 능력뿐인 ‘추한 놈’은 가차없이 솎아내야 마땅하지만.

한 가지 노파심. ‘코드 기관장’들이 떠난 자리를 또 다른 코드들이 몰려와 채울 가능성도 크다. 좋은 놈도 아니고 나쁜 놈도 아니고 추한 놈들만 꾀어들까봐 지레 걱정이다.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