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美 대선과 6자회담 방정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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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포스트지 3월 4일자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제2차 6자회담 미 대표단에 북핵 폐기와 관련, 미 행정부의 인내심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할 것을 직접 지시했다고 전하고 있다. 부시의 이 훈령은 회담 사흘째 날 6개국이 공동성명 초안 작성을 위해 세부적인 의견 조율을 하고 있을 때 베이징(北京)에 전달됐다. 그리고 이 짧은 훈령은 중국이 추진 중이던 공동성명 문안에 대한 논의를 중지시키고 말았다. 부시의 이 같은 개입은 미 행정부의 모호한 대북 태도를 드러냈으며, 미 행정부 내 북핵 문제를 놓고 협상파와 신보수 강경세력 간의 정책대결이 계속되고 있음을 노출시켰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미국의 강경 자세가 사실상 북한으로 하여금 이전 입장으로 선회토록 하고 말았다.

부시 대통령으로선 이제 대선 걱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현 시점에서 그의 대선 승리를 낙관하긴 이르다. 그러나 필자는 향후 6자회담의 향방이 부시의 재선에 큰 몫을 할 것으로 예상한다. 부시에게는 대선 승리를 위해 두 가지 선택(options)이 있다. 첫째로 부시 대통령이 신보수주의자(네오콘)들의 대북 강경정책에 손을 들어준다면 북한도 부시 정부에 대해 강경입장을 구사할 것이고, 그럴 경우 향후 6자회담은 11월 2일 치러질 미국 대선까지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한 채 협상 프로세스 자체가 중단되는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때 북한은 부시 대통령에 대한 비난의 강도를 높일 것이고 민주당의 존 케리 후보가 이를 십분 활용해 선거국면을 유리하게 이끌어 간다면 부시의 재선은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둘째로 부시가 협상파의 손을 들어준다면 실무회의와 향후 3차 6자회담에서 북한과 미국이 양보와 대타협을 통해 큰 진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도 이에 협조할 것이고 2차 회담에서 풀지 못했던 핵심 사안들이 북.미 간 합의점을 찾아 어느 정도 타결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북.미관계 개선이 점차 가시화하고 부시의 대북정책이 민주당 선거캠프의 비판대상에서 제외될 것이다. 오히려 북한과의 충돌상황을 피하고 협력관계를 유지하게 됨으로써 재선 가능성이 커지는 상황의 진전까지 예상할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선택을 놓고 부시는 조속한 시일 안에 입장을 정해야 한다.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 부시는 무엇보다 '정치인(politician)'이기에 재선 승리가 그의 입장 결정에 최우선적으로 고려할 사항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필자가 정치인 부시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하는 것도 그래서다.

부시 대통령이 지난 1년6개월 동안 북핵 문제와 관련해 북한과의 대타협을 이루는 데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행정부 내 신보수주의 강경파 때문이었다. 네오콘들은 북한의 정권교체가 대북정책의 목표임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대북정책의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그들 역시 북한의 정권교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서라도 부시의 재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부시는 협상파의 손을 들어줄 것이고 향후 6자회담의 가시적 성과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끝으로 어떤 분석가들은 올 11월 미 대통령 선거를 염두에 둔 북한이 미국과 현 시점에서 서둘러 거래할 이유가 없다면서 지연전술을 구사할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이는 북한이 베이징 회담에서 처음으로 회담에 진지하게 임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북한의 태도 변화는 흔히 중국의 설득에 따른 것이라고 평한다. 북한은 중국 대표단장 왕이(王毅) 이름으로 된 의장 성명서의 최종 문안에 '핵무기 없는 한반도'라는 문구에도 합의했다. 지난해 8월 1차 6자회담이 끝났을 때 더 이상 회담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목청 높였던 북한이 "우리는 1단계에 들어와 있고, 끝까지 갈 작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북한이 진지한 협상의 틀에 들어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6자회담은 이제 공식적인 다자회담의 틀로 제도화되고 있다. 변화된 북한의 협상태도를 정확히 인식하고 미국도 북한과의 협상에 좀더 진지해져야 한다.
곽태환 남북평화사업 범국민운동본부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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