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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에 관한 이야기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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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사마리아'의 김기덕 감독 수상 축하연은 썰렁했다. 썰렁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표현이며 칸 때 호텔의 대형 연회장이 입추의 여지 없이 들어찬 하객들 틈에서 겨우 수상자를 찾아 악수하는 것이 고작이었다면 베니스 때는 파티장 벽에 화려한 플래카드를 도배질하고 수상 후일담을 긴 시간 꽃 피우던 때에 비하면 열기가 식었다는 뜻이다.

둘러보아도 현재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없고 한 사람의 여배우와 충무로를 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노후 인력뿐이다. 그 많은 젊은 영화인들은 다 어디를 갔을까. 수상자는 선배님들을 불러내 송구스럽다고 거듭 말했다. 그러면서 자기의 작품세계는 앞으로도 변함없이 동일한 주제가 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나는 그를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인데 퍽 고독한 눈빛이었다.

힘들게 10편이나 되는 자기 발언을 영화로 해낸 표정이 바로 이런 것일까. 그래. 예술이란 고독한 것이라고 했어, 그토록 인내한 긴 시간의 축적이 은곰상이 되어 돌아왔는데 뭘 걱정하니, 앞으로도 잘 견디어 큰 감독이 되어야지. 끝내 말은 되지 않았지만 나는 그를 위로하고 있었다.

수상작의 피날레는 이렇게 끝난다. 소녀의 아버지는 가해자들을 용서하지만 딸을 비참하게 살해한다. 물론 이것은 꿈으로 처리된다. 산길에서 딸에게 쏘나타의 핸들을 잡게 하고 혼자 빠져나오게 한다. 운전 경험이 전혀 없어 필사적으로 차를 모는 소녀의 원경이 더없이 고독해 보이지만 이 길은 스스로 빠져나와야 하는 길이었다.

내 고향 조병화 시인은 고독을 사랑한다는 말을 즐겨했다. '예술(藝術)은 고독(孤獨)'이란 글을 서재에 붙여놓고 살았는데 작고하기 얼마 전 명륜동 옥잠화를 썼다. 먼저 떠난 아내가 심은 옥잠화가 피운 꽃을 보고 더욱 고독하다고 절절히 읊었다.

고독이란 글을 썼다가 혼쭐이 난 친구가 생각난다. 우리는 10년쯤 가혹한 식민지 교육을 받은 세대인데 일제 말기는 거의 일본인으로 조련돼 있었다. 기숙사는 병영과 다름없고 교사는 전원 일본인, 자나깨나 전쟁에 승리해야 한다는 구호 속에 지냈다. 그런 와중에도 자연현상이랄까 우리들의 젊음은 익어가서 마음은 때론 방황을 했다. 그때 김세중이 쓴 작문 고독은 우리들 심리를 너무 잘 표현한 글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노발대발하며 꾸짖었다. 보라 동해의 하늘이 트고 찬란한 태양이 솟을 때 천지에 정기는 넘쳐나고 희망의 8대주는 춤을 춘다(일제 말기의 노래). 이렇게 행복한 시대에 살면서 퇴폐적이고 이기적인 고독을 혼자 즐기고 있다니 너 같은 자가 바로 비국민이다.

우리가 어른이 되었을 때 그는 조각가가 되어 광화문 네거리에 장군을 세웠다. 조각은 자기기만이란 환상을 유발하기 때문에 뮤러의 원반을 던지는 사내는 천년을 두고 한자리에 굳어 있지만 보는 사람은 우람한 근육의 움직임과 하늘을 가르고 날아간 원반이 초원에 꽂히는 환영을 그린다. 나는 친구의 조각에서 늘 환영을 본다. 자리를 옮기느니 마느니 떠들썩해서 그런지 장군의 얼굴에는 더 짙은 고독의 그림자가 서려있는 것을 보게 된다.

'사마리아'가 개봉되는 날 기상이변으로 봄눈이 쏟아졌다. 눈 오는 도시는 곧 교통이 헝클어지고 그것은 관객동원에 악재가 된다. 그러나 '사마리아'의 객석은 꽉 찼다. 얼마나 신나는 이야기인가. 감독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金감독, 항간의 인기나 지지가 결코 당신의 예술을 지탱해주지는 않을 것이며 당신의 눈빛이 김기덕 영화를 빛나게 할 것이다. 정신없이 탁류처럼 흐르는 현실 속에서 고독한 자기를 발견하는 사람만이 올바른 자기발언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지.

김수용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