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과잉안보의 逆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미국이 북한과 장성급 군사접촉을 추진하면서 한국측 입장이 참으로 난처해졌다.한국측이 핵협상과 연계된 남북관계 부진을 이유로 신중히 대처하도록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북한측 요구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신중히 대처해달라는 우리측 요청이 그나마 먹혀 미국측은 정전위(停戰委) 틀 속의 변형된 군사접촉안을 북한측에 보냈다.북한측이 이를 아직 받아들이지 않고 있지만 계속 불씨가될 전망이다.
그런데 여기에 다른 문제가 감춰져 있다.들리는 바론 우리측이미국에 북한측 제의를 받아들이지 말도록 요구하면서 정 안되면 지방선거 이후로라도 연기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지방선거와 장성 접촉이 어떤 관계에 있길래 이런 소리가 나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혹시 이런 발상 속에는 남북관계나 이와 관련된 안보문제를 선거와 연결짓겠다는 모종의 의도가 감춰져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들이 있다.
얼마전 육참총장이 느닷없이 북한의 도발을 강력히 응징하겠다는발언을 해 우리가 모르는 심각한 상황이 진행되고 있는게 아닌가하는 의혹을 주던 때와 상황이 몹시 흡사하다.
이런 발상이 정부 안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어 큰 정치행사 때마다 불거져 나온다는 것은 큰 문제다.
내부적으로 무슨 난처한 일이 생길 때마다 안보위기론을 불러일으켜 넘어가곤 했던 군사정권 시절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한때는 5월 위기설이니,6월 위기설이니 하는 말이 떠돈 적이있었다. 여러가지 복잡한 시나리오가 있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북한이 핵협상 시한을 넘기면 다시 북한을 응징하려 나설것이고 이에따라 한반도에 위기상황이 조성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측은 그런 시한(時限)은 없다는 것이고 최소한 북한이 핵연료의 동결상태를 지속하는한 북한과의 협상은 계속될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런 韓美간 이견의 밑바닥엔 요즘 자주 언급되듯이 북한의 시간끌기 작전에 대처하는 두 나라간의 근본적인 외교적 시각차가 있는 것이긴 하겠지만 그밖에도 핵상황을 심각하게 끌고가고자 하는 측과 그런 긴장요인을 비치지 않으려는 쪽의 견 해 차이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해석도 가능할 것같다.지방선거때까지 장성급 접촉을 연기하자는 요청이 사실이었다면 그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안보과잉 시대를 살아왔다.모든 것이 안보에 연결되고,그것이 모든 논리를 덮어버리던 시절을 살아왔다.
그런 주장의 첫번째 폐해는 진짜 안보문제에 대한 국민적인 경각심을 흐리게 만드는 것일게다.
우리는 지나친 안보논리에 대한 극단적인 반사작용으로 좌파(左派)이론이 판치던 80년대라는 위태로운 「붉은 10년」간을 아슬아슬한 심정으로 지켜봤었다.그 경험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안보 과잉의 다른 부작용은 그것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의 해결에 발목을 잡는 역기능을 할 것이라는 점이다.
「안보효과」를 얻기 위해 해결될 가능성이 있는 것들 조차도 선거나 또 다른 정치행사와 결부하려 들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다.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안보과잉이 자칫하면 군부통치 시절과같은 극우(極右)보수주의적 권위주의 부활의 징조여서는 안된다는것이다. 우리 사회에 30여년 군부통치의 뿌리는 아주 깊다.조금이라도 문민(文民)의식을 늦추면 그 틈새로 지 난 날의 권위주의적 의식과 행태가 삐져 나오는 것이다.
지방선거의 전망이 별로 밝지 못한 판에 북쪽에서 무엇이 터져주지 않나 하는 여당의원의 농담이 꼭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을 때도 있다.서울시장 후보를 놓고 보수성이니,이념성이니 하고 따지는 것도 그런 발상의 저류를 짐작케 하는 요소들 일 것이다.
최근 국군기무사는 북한의 땅굴이라고 소문이 무성하던 김포의 땅굴이 석회동굴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또 통일원은 북한과의 핵협상의 난항에도 불구하고 대북 경협제한을 완화하는 실질적인 조치들을 취했다.
우리는 이같이 합리적이고 건전한 생각들이 정부안에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선거가 과열되면 또 과잉안보적 발상이터져 나오지 않을지 항상 준엄하게 경계해야 할 것이다.
〈편집부국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