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포럼

채신머리 없는 품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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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막가는 세상이다. 위아래 가릴 것 없이 입을 열었다 하면 상대방의 복장을 확 긁어버리는 살벌한 표현을 마구 쏟아낸다. 예의와 배려는 고사하고 격조를 따질 겨를조차 없다. 서로를 좀 더 헐뜯지 못해 흠집내지 못해 아우성이다. 사안의 옳고 그름은 뒷전이다. 오로지 상스러운 말싸움만이 난무한다. 행동 또한 어디 질쏘냐. 세상에 혼자만 존재하는 듯 막무가내로 처신한다. 험악한 설전과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작태는 올해따라 유난히 심하다. 꽃샘추위가 길어진 때문인지 올 봄의 목련은 아담한 자태를 예년과 달리 꽤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다. 인간사가 을씨년스러울수록 자연은 더욱 아름다워 보이게 마련인가. 거칠어진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과 주위를 되돌아보라는 계시일 텐데 우리 사회의 아귀다툼은 날로 심해지고 있으니 답답하다.

모 대학 명예교수의 망언은 올해가 제법 시끌벅적하리라는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그는 일본의 한국 지배를 원망하기보다 일본인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라고 내뱉었다. 비난 여론이 들끓고 일제 침략행위 왜곡 및 옹호 방지 법안 제정이 논의되면서 그는 명예교수직을 그만뒀지만 여진은 이어지고 있다. 한 술 더 뜬 한 시사평론가가 위안부 할머니들이 가짜라는 의문이 든다고 망발하고 있으니 말이다. 1944년 끌려간 여성이라면 현재 78세 이상으로 거동이 불편할 것인데 TV에 보이는 그들은 건강도 좋아보이고 목소리에 활기가 있다는 것이다. 일제 말기 갖은 치욕을 당한 그들에게 할 소리는 결코 아니다.

철도공사의 러시아 사할린 유전개발 의혹 사건에 연루된 인사들의 생뚱한 언행은 더욱 가관이다. 특히 철도공사에 유전개발을 제의한 것으로 철도공사의 회의록에 적시돼 있는 여당 의원의 해명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는 거듭되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관련설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문건은 계속 공개되고 관계자의 인터뷰와 국회 상임위의 답변이 잇따르고 있지 않은가. 야당의 유전 의혹 특검법안에 대해 나라를 좀먹은 쓰레기 같은 정치라는 그의 힐난이 막말로 들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 시민권을 가진 사업가의 전화번호를 주면서 만나보라고 했을 뿐이라고 강변하고 누군가가 나를 팔고 다녔다고 억울해 할 일이 아니다.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대통령 측근답게 조신했어야 한다.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국가에 손해를 초래한 단초가 된 전화번호를 준 것은 분명 잘못이다.

건교부 차관의 처세도 문제다. 당시 철도청장으로서 구체적 지시는 안 했다고 버티는 그는 현직을 유지한 채로 수사를 받을 것이라고 한다. 감사원의 수사 요청으로 검찰의 출국금지 조치와 자택 압수수색에 이어 다음주에는 소환 조사가 불가피하다. 별일 없다는 듯 매일같이 출근하고 임시국회에서 답변하는 모양새가 좋아보이지 않는다. 머릿속이 온통 유전 사건에 얽매어 있어 정부 내 상.하급자와 민원인을 대면하기가 거북살스러울 텐데 업무 처리가 원만할 턱이 없다. 굳이 자리를 지키겠다면 수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휴가 또는 휴직하는 게 옳다.

문제의 사업가를 두 번 대면한 통일부 장관도 떳떳하지 못하다. 더구나 그를 여당 의원에게 소개하고 광업진흥공사 사장 면담 시 동행한 것으로 알려진 대통령의 후원회장을 지낸 인사도 당당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권력의 주위에 있을수록, 지위가 높을수록 몸가짐과 마음가짐과 말씨에 품격이 있어야 한다. 잠시 주어진 권세에 기대어 출세를 지향하고 재물을 좇을 경우 악취를 풍기고 세상을 혼탁하게 한다.

도성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