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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디자인으로 경쟁력 키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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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와 관련, 최근 필자가 관여한 바람직한 디자인 사업 성공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나라의 얼굴인 여권 디자인 개선 사업이다. 외교통상부와 문화관광부가 전자여권(ePassport) 도입을 계기로 여권 디자인을 개선하기로 뜻을 모은 것은 지난해 5월이다. 이어 6월 디자인계를 대표하는 인사들과 두 부처 공무원들을 구성원으로 해 민관 합동의 여권디자인개선추진위원회가 조직됐다.

이 사업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7월부터 한 달간 온라인 공모전을 개최하는 한편, 전문 디자이너를 대상으로 지정 공모전을 진행했다.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열 분의 디자이너가 참여했다. 새로운 여권 디자인은 우리 문화와 자연, 역사와 예술을 조화롭게 보여줄 수 있는 개발 방향이 제시됐다.

국민 아이디어 공모전에서는 총 289건의 응모작 중 6개가 당선작으로 선정됐으며, 지정 공모전에 제출된 10개 작품 가운데서는 최우수작 두 개와 우수작 한 개가 선정됐다. 지난달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이들 당선작을 포함한 여권 디자인 공모 당선작 전시회도 열린 바 있다. 앞으로 외교통상부가 국제 신분증으로서 여권의 기능성 및 경제성 등을 고려해 전자여권에 반영할 최종 디자인을 선정, 발표할 예정이라고 한다.

필자는 가는 곳마다 이 사업을 자랑스럽게 소개한다. 이번 당선작들이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스위스 여권 못지않은 멋진 디자인을 선보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일을 진행해 온 과정 자체가 세계 디자인계의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몇 가지를 꼽아 보자. 첫째, 일상생활 환경의 디자인 개선을 통해 국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국가 이미지를 제고하자는 거시적·장기적 목적하에 여권 개선이 정부 차원에서 추진됐다는 것이다. 국가적 차원의 공공디자인 개발·보급 사업의 첫 성공사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2004년 자동차번호판 교체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난맥상과 대비된다.

둘째, 여권법에 의해 여권은 외교통상부 장관이 발급하도록 규정되어 있는바, 외교통상부와 문화관광부 간 협업을 통해 새로운 여권 디자인이 탄생해 바람직한 정부 부처 간 협력모델을 제시했다는 의미도 있다.

셋째, 우리나라 디자인계를 대표하는 각 기관·단체의 추천을 받아 10명의 전문 디자이너를 선정하고, 치열한 경쟁과 공정한 심사를 통해 최고의 디자인을 선정한 과정 자체가 모범이 되고 있다. 각 단계마다 참여한 디자이너들에게 보수를 지급한 것 또한 ‘아이디어의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해 준 선례가 될 것이다. 넷째, 이번 추진위원회의 구성과 운영을 통해 민관 협치(governance)의 모델을 제시했다. 정부가 어떤 분야를 육성하고자 할 때 흔히 ‘지원’이라는 수단을 동원한다. 그러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디자인 역시 돈을 쏟아 붓는다고 하루아침에 꽃피우는 게 아니다. 안철수씨가 지적하듯, 분별없는 지원이 오히려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디자인 발전을 위해서는 개별 제품·기업에 대한 지원보다는 디자인문화의 진흥과 인프라(국민 인식 제고, 공정한 시장질서 구축, 지원제도 개선) 정비가 선행돼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사업은 칭찬받기에 손색이 없다.

장동련 홍익대 교수·세계그래픽디자인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