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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명의 또다른 대통령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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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오늘 새 정부의 5년이 시작된다. 주연은 이명박 대통령이다. 그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는 앞으로 5년간 뉴스의 초점이 된다. 새 대통령을 향한 덕담과 충고가 쏟아진다. 그러나 노무현 청와대를 지켜본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52명의 대통령 얘기를 하려는 건 그 때문이다. 지난 주 금요일 마흔두 개 자리의 청와대 비서관이 내정됐다(3명은 미정). 이미 발표된 대통령실장·수석과 합쳐 비서관급 이상 청와대 사람들은 52명이 된다. 이들이 이명박 청와대를 끌어갈 팀이다. 이젠 그들 한 명 한 명이 대통령이고 곧 청와대다.

지난해 7월이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가 열린 과테말라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를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시간을 아끼려고 컵라면까지 먹어가며 온 힘을 쏟았기에 유치에 나선 사람들의 허탈감은 더 컸다. 청와대 비서관 몇 명과 기자들은 현지 호텔에 마련된 임시기자실에서 술로 아쉬움을 달랬다. 몇 순배가 돈 뒤 한 비서관이 불쑥 “이번에 와서 보니 ○○기업은 참 열심히 하는데 기업은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더라”는 말을 했다. 농담까지 뒤섞인 술자리여서 기사는 쓰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귀국하고 보니 재계는 그 비서관이 던진 한마디에 발칵 뒤집혀 있었다.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고 언급된 기업의 사람들은 오해를 풀겠다며 동분서주했다.

보통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청와대 담장 안 얘기는 대부분 대통령의 비서들을 통해 전달된다. 그들이 전하는 말 한마디가 갖는 무게는 생각보다 엄청나다. 그 말에서 우리는 전체를 다 들여다 볼 수 없는 ‘코끼리’를 뭉툭하다고도 하고, 뾰족하다고도 여긴다. 그들이 건방지면 대통령이 건방지게 묘사되고, 그들이 겸손하면 대통령이 겸손하게 묘사된다. 이처럼 대통령의 사람들은 청와대 밖과의 소통에서 대통령을 대표한다.

이들이 중요한 이유는 또 있다. 대통령을 모시는 사람들은 청와대 밖과 대통령을 화해시키는 요령이 있어야 한다. 대통령의 분노가 100이면 50으로 가라앉히는 요령 말이다. 노무현 정부 마지막에 언론과의 소통을 완전히 틀어막은 건 ‘취재 지원 선진화’ 방안이었다. 청와대 사람들 중 일부가 지금도 아쉽게 생각하는 대목이 대통령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중화하는 슬기로운 촉매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몇몇은 되레 그 분노를 150으로, 200으로 증폭시켜 대통령과 언론의 관계를 끝내 단절과 고립으로 몰고 갔다.

대통령은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하는 자리다. 이라크에 국군을 파병해 달라고 미국이 요청할 때,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인이 인질로 잡혔을 때 대통령의 선택을 고독하지 않도록 돕는 게 비서들의 역할이다.

대통령 비서실장을 오래 한 Q씨에게 장수 비결을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대통령에게 ‘예스(Yes)’라고 말하는 건 가장 쉬운 일이다. 대통령 앞에서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노(No)’라고 말하는 건 둘째로 쉬운 일이다. 그러나 진짜 대통령을 위한다면 ‘노’라는 말로 끝내기보다 새로운, 제3의 대안을 내 대통령의 선택을 넓혀주는 비서가 돼야 한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명박 대통령과 청와대 사람들의 5년 항해는 시작됐다. 순항이 되길 바라지만 때론 거센 풍랑도 만날 수 있다. 그때마다 52명의 대통령실 사람들은 대통령을 도와야 한다. 그래서 출발선에 선 오늘, 나는 52명의 또 다른 대통령에게 각별히 주목한다.

PS. 청와대에는 비서관 밑에 국·과장들도 많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이들은 수석이나 비서관을 통해 대통령을 접한다. 

박승희 정치부문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