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영희 칼럼

이라크 임시헌법 이후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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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사담 후세인의 장기 독재에 피폐하고, 미국의 침공으로 국가.사회조직이 깡그리 붕괴된 이라크를 재건하는 긴 여정(旅程)에 획기적인 이정표 하나가 세워졌다. 이라크 통치평의회가 최종 승인한 임시헌법(기본법)이 그것이다.

임시헌법의 성립으로 6월 임시정부에 주권이양, 연말에서 내년 초까지 직접선거에 의한 제헌국회 구성, 내년 8월 15일까지 항구적인 헌법초안 마련, 10월 15일까지 헌법안에 대한 국민투표, 12월 15일까지 국회의원 선출, 내년 연말까지 100% 이라크인의 정부 출범이라는 민주화 과정의 첫걸음은 확실하게 내디딘 것이다.

*** 英신문 "美 정치적 승리" 평가

임시헌법은 이라크 민주화 과정의 첫 단추다. 그래서 미 군정당국은 임시헌법에 자유민주주의를 충분히 담아두어야 진짜 헌법을 만들 때 다소 물타기가 되어도 자유민주주의를 기본 틀로 하는 뉴 이라크의 탄생이 가능하다는 인식 아래 통치평의회에 강도 높은 압력을 넣어 왔다. 그리고 미국은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가 "미국의 정치적인 승리"라고 부른 임시헌법을 확보했다.

임시헌법은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국회의원 275명의 25%를 여성에게 할당하고, 쿠르드족에 자치정부를 주었다. 군대의 문민지배를 규정하고 민족과 여성 차별을 폐지했다. 후세인 시대에는 철저히 억압받던 국민의 기본권들이다. 뉴욕 타임스는 임시헌법을 중동지역에서 가장 진보적인 문건이라고 평가했다.

이슬람교의 지위에 관한 흥정이 어려웠다. 점령군 당국은 이라크를 철저한 세속국가로 만들고 싶었다. 이라크인들은 이슬람교를 법률의 '근거의 하나'로 인정한다는 데 만족하고 이슬람을 법률의 '유일한 근거'로 못박자는 입장을 철회했다. 점령군 측은 이슬람에 반대되는 법률을 만들지 않는다는 규정에 동의했다.

그렇다고 지금부터 이라크 민주화 과정이 순조롭다는 보장은 없다. 제헌국회가 항구적인 헌법을 만들 때 임시헌법의 자유주의적인 기본권들을 얼마나 살릴 것인지 알 수 없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협력한 쿠르드족에 자치권을 주는 데 대해 다수파 아랍족과 소수파 투르크멘족이 반발하는 것도 내전의 불씨로 남아 있다. 세 민족이 영유권 싸움을 벌이는 유전도시 키르쿠크 문제에는 손도 못 댔다.

미국의 야심도 말썽이다. 부시 정부의 신보수파(네오콘)들은 이라크에 이어 중동의 주요 국가 전부를 민주적으로 개혁해 이스라엘의 항구적인 안전을 보장하려고 한다. 그들의 최종 목표는 미국을 대주주, 이스라엘을 소주주로 하는 중동 콘도미니엄(공동관리)이다. 딕 체니 부통령이 다보스 포럼에서 중동의 개혁을 위해 모든 우방의 지원을 촉구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가 당연히 반발하고 있다.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은 아랍국가들은 각국의 이해와 가치와 특수성에 따라 개혁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임시헌법 합의로 이라크 민주화 과정에 속도가 붙는 것과 동시에 테러가 빈발하는 것도 미국이 기세좋게 밀어붙이는 민주화 개혁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이스라엘까지 배려한 중동 경영의 야망에 집착한다면 테러를 동반한 반대운동이 더욱 극렬해질 수 있다.

*** 쿠르드族 자치 싸고 내전 우려도

이런 사태에는 3600명의 군대를 보내 이라크 재건에 참여하는 한국의 직접적인 이해가 걸렸다. 아랍.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은 중동의 전제군주적 또는 권위주의적 정치체제에 반대하면서 동시에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도 반대한다. 미국이 이런 패러독스를 무시하고 이라크 전후 처리를 이라크의 안정과 민주화에 한정하지 않으면 임시헌법으로 얻은 전리품까지 놓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전 세계에 민주주주를 전파해 인류를 해방시키겠다는 웅대한 청사진을 제시했을 때 불세출의 언론인 월터 리프먼은 그러자면 미국은 영원히 십자군전쟁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제2의 월터 리프먼이라는 칼럼니스트 윌리엄 파프도 자기절제를 모르는 것이 미국 대외정책의 큰 약점이라고 지적했다. 리프먼과 파프는 바로 오늘의 중동.이라크 정책을 두고 부시 정부를 위해 그런 쓴소리를 했던 것 같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