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절차가 타당해야 성과도 빛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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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과 방패의 대결은 앞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비준, 노사관계 등의 무대에서 반복될 것이다. 이러한 대결이 생산적인 경쟁으로 이어지기 위해선 모든 정치인이 함께 새겨두어야 할 교훈과 과제가 각각 하나씩 있다. 먼저 역사의 교훈. 지난 20년의 경험을 통해 보면, 우리 시민들은 민주주의의 두 날개(성과와 절차)를 모두 중시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시기와 환경에 따라 어느 한쪽을 좀 더 강조하기는 하지만, 민주주의는 이 두 개의 기둥 위에 서 있다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예컨대 참여민주주의를 내세운 노무현 정부가 시민들의 외면을 받은 것은 시민참여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유권자들은 참여정부가 경제나 그 밖의 성과도 잘 올리기를 기대했던 것이고, 이에 역부족이었던 노무현 정부를 차갑게 외면했다.

다음 주에 출범하는 이명박 정부 역시 시민들의 까다로운 잣대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 마치 몽골 기병처럼 속도감 있는 행동과 엄청난 에너지로 무장한 이명박 정부에 대한 평가가 단지 경제성장률에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이명박식 경제 살리기가 뚜렷한 성과도 올리지 못한 채 노사 갈등과 보·혁 대결을 확대한다면, 지지자들은 손 안의 모래처럼 빠져나갈 수도 있다. 더구나 이명박 당선인의 지지층은 감성적 유대감으로 연결된 충성스러운 지지자라기보다는, 경제적 이해관계에 기반한 합리적 유권자가 아닌가? 물론 새 정부가 ‘한강의 기적’을 재현해 낸다면 이 같은 염려는 필요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외여건이 악화되고 있는 올해에 획기적인 성장은 어려울 것이고, 그럴수록 이명박 정부는 속도전과 진지전(陣地戰)을 적절히 배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어서 이번 정부조직 개편안을 둘러싼 샅바싸움에서 드러나는 우리 정치의 핵심 과제 하나. 대통령 당선인과 예비 야당의 개막전에서 ‘정당은 실종’되었다. 여야 협상의 형식적 대표는 한나라당이었지만, 전략과 전술은 모두 대통령 당선인 주변에서 주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지난 대선 과정에서부터 노골화된 것이지만, 한나라당은 대통령 후보·대통령 당선인의 여러 보좌역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야당 진영에서도 정당의 실종 현상이 심각하기는 마찬가지다. 단지 손학규 대표의 개인기에 의존하고 있을 뿐 통합민주당은 여전히 패전의 후유증과 방향감각 상실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 정치에서 ‘정당이 실종된 민주주의가 지속되는 현상’은 단지 정치학자들의 토론거리에 그칠 문제가 아니다. 미국 대선의 오바마 선풍이 보여주듯, 정당(조직)을 통해 시민들은 자신들의 억눌렸던 꿈과 욕구를 발산한다. 또한 얼마 전 미국 의회가 경제 살리기를 위한 패키지 법안을 초당파적으로 신속하게 통과시키는 데에서 보듯, 정당은 책임감 있는 국정운영의 마지막 보루이기도 하다. 정당이 빠진 민주주의는 서까래 없이 기둥과 지붕만으로 서 있는 부실한 구조물에 불과한 것이다.

정리해 말하자면, 이명박 정부의 경제 살리기 프로젝트는 단지 경제에만 집중한다고 해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시민들은 새 정부에 경제 살리기라는 과제를 맡겼지만, 민주주의 절차의 고상함을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니다. 시민들에게는 여전히 ‘국정 평가=경제적 성과×절차의 세련됨’이다. 그리고 이 절차의 핵심에는 정당정치가 자리 잡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문제는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장훈 중앙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