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두우시시각각

잔뜩 위축된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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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1주일 후 청와대를 떠날 대통령에게 그리 가혹하게 비판할 것 있느냐고? 사실 잘못이 적지 않은 이라도 사퇴하거나 죽기라도 하면 굳이 그 잘못을 파헤치지 않는 게 한국적 정서인지도 모르겠다. 숭례문 방화 용의자가 몇 년 전 다른 문화재에 방화했을 때 법원조차 집행유예를 선고하면서 그의 ‘고령(高齡)’을 이유로 드는 게 한국이니 말이다. 하기야 국민은 노 대통령이 숭례문을 찾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입에 담지 않을 정도가 됐다. 이미 그는 국민의 머릿속에서 ‘잊혀진 대통령’이 된 지 오래다.

 불타 버린 숭례문의 마지막 모습이라도 보겠다며 멀리 지방에서 일부러 서울을 찾는 국민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현직 대통령은 왜 가보지도 않는 것일까. 현장을 찾는 게 ‘정치 쇼’라고 생각해서? 촌음을 아껴서 문화재 보호대책을 수립하느라고? 괜히 찾아갔다가 야유를 받거나 책임을 몽땅 뒤집어쓸 것 같아서? 설혹 그렇다 해도 대통령이 그래서는 안 된다. 대통령은 국민이 아파하는 곳에 함께 있어야 한다.

아마도 노 대통령이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됐기 때문이리라. 누구나 대선 참패의 핵심 요인을 노 대통령에 대한 염증으로 꼽는다. 범여권 정당이라는 통합민주당도 노 대통령이 가까운 척이라도 할까봐 일찌감치 선을 그었다. 친노 세력은 총선 공천도 위태로울 지경이 됐다. 청와대는 철저히 소외되고 고립됐다. 씨가 마르다시피 됐다. 그러다 보니 아예 숭례문 현장에 가봐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사례는 더 있다. 다음주 월요일 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나와 KTX 열차 편으로 봉하마을로 낙향한다. 그런데 현 정부 장·차관을 지낸 인물 중에서 함께 갈 사람을 모집해 보니 한 자리 숫자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마지못해 KTX에 동승키로 한 전직 장관도 있다. 현 정권에서 혜택을 누렸으면서도 노 대통령의 마지막 행사조차 외면한 이들의 인심도 정말 야박하지만, 노 대통령도 “내가 이 정도인가”하는 자괴감이 들지 않을 리 없다.

2월 초 총선 출마차 청와대를 떠나는 수석·비서관과의 송별회에서 노 대통령이 한 말에서도 심경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총선에 나가서 내 이름을 거론하는 게 도움이 안 될지 모른다. 그러니 굳이 나와의 인연을 밝히지 않아도 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대통령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노 대통령의 뒷모습은 정말이지 쓸쓸하다. 외환위기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은 김영삼 전 대통령, 아들들의 문제로 임기 말을 식물 대통령처럼 보냈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물러나는 모습도 아름답지 못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도덕적으로 그리 부패하지도 않았는데 왜 이럴까. 국민의 가슴에 상처를 남기는 말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통령직을 가볍게 알고 국가의 품격을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취임하는 이명박 당선인은 노 대통령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대통령의 발언이 어떤 무게를 가지는지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겉으로는 진화된 듯 보였던 숭례문도 속 불이 붙으면서 결국 전체가 무너졌다. 국민의 가슴에 속 불이 붙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출범하는 새 정부가 이런 교훈을 너무 쉽게 잊어버린 듯해서 하는 말이다.

김두우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