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서] 정면으로 받아 친 고이즈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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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1일 허리를 꼿꼿이 펴고 어깨에 힘을 주며 말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상대의 입장을 존중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3.1절 기념식'에서 "일본 지도자들은 식민 역사와 관련해 행동과 발언을 신중히 해달라"고 한 말을 정면으로 받아친 것이다. 너무나 '당당해진' 고이즈미 총리의 모습에 당혹감을 느꼈다.

과거사 문제에 관해 3년 전 갓 취임했을 때 그는 '적어도' 겉으론 겸손했다.

2001년 4월 취임한 고이즈미가 그해 8월 태평양전쟁 A급 전범 14명이 합사(合祀)돼 있는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전격 참배하자 한국.중국은 "총리가 일제 침략을 미화한다"며 거세게 일어났다.

두달 뒤 중국.한국을 잇따라 방문한 고이즈미는 중.일 전쟁의 도화선이 된 노구교(盧溝橋)의 항일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가 있던 독립공원 등을 찾아 일제 침략 역사를 사과했다.

"야스쿠니 신사 대체시설 건립을 검토하겠다"고 했고 더 이상 참배하지 않을 뜻도 비췄다. 사태는 일단락되는 듯싶었다.

그러나 그는 이후 매년 한차례씩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그때는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선 안 된다는 마음에서 참배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다 올해는 1월 1일 기습적으로 참배하며 '새해 첫날 신사를 찾아 복을 기원하는 일본인들의 전통 풍습'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두달 뒤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라"며 뻣뻣하게 나온 것이다.

매년 참배하고, 신사 대체시설 건립계획이 사실상 취소돼도 한국.중국과 별 마찰이 없이 지나가고, 일본 내 비판여론도 줄어드니까 고이즈미 총리의 '배짱'이 두둑해진 듯싶다. 이렇게 가면 보수우익세력들이 말하는 "한국.중국의 비판은 내정간섭"이란 논리로까지 발전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럴수록 한국.중국 국민의 감정은 더욱 차가워진다. 중국 정부는 올 1월 '남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일'이라고 비난할 정도로 화가 난 상태다. 동북아시아의 미래와 일본에도 나쁜 일이다. 국가 지도자의 언동은 늘 신중해야 하는 법이다.

오대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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