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제 12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바보 짓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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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장면도

 '제 12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4강전 3국 하이라이트>
○·구 리 9단(중국) ●·박영훈 9단(한국)

 장면도(109~124)=백△의 압박에 109로 달아난다. 그러자 다시 110의 추격. 이 두 수에서 백은 화려하게 피어난다. 구리 9단은 절정의 감각으로 절정을 향해 비상하고 있다. 1대1에서 맞이한 최종전. 결국 결승 진출은 구리의 몫인가.

박영훈 9단은 불안하다. 점점 팽창하는 좌변 백진은 공포스러운 새의 흰 날개처럼 눈앞을 어지럽힌다. 그러나 그는 조급증의 불길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111로 하변부터 지킨다. 이제부터는 한 수 한 수가 인내의 싸움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114가 신경을 긁을 때는 정말 괴로웠다. A로 받아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B의 곳은 진정 두고 싶다. 와락 달려들어 백이 공들여 쌓은 좌변을 불질러 버리고 싶다.

하지만 분노는 승부의 독(毒)이다. 박영훈은 혼신의 힘을 다해 115로 참는다. 실리에 대한 갈증으로 목이 타는데도 오히려 집 대신 두터움을 강화하며 때를 기다리기로 한다. 이 무렵이, 그러니까 상대가 116이라는 눈부신 현찰마저 가져가버릴 때가 박영훈에겐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변화가 절실한데도 모험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차례로 사라지고 있었다. 승리로 가는 모든 길목이 막히고 있었다. 한데 그 고비를 넘기자 마치 마법처럼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119를 선수하자고 했을 때 구리는 C로 받는 대신 122로 하변을 돌파했다. 구리는 120과 122의 콤비네이션을 꼭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120이 흑D의 차단을 사전 봉쇄하고 있다). 하지만 C로 막아 이긴 바둑인데 스스로 변화를 일으켜 상대를 기쁘게 해준 것은 심하게 말하면 ‘바보짓’이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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