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7년 만에 함께 돌아온 '남자충동'과 안석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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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배우 안석환(45)은 "그 순간을 평생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7년 전이었다. 대학로에서 연극'남자충동'을 공연할 때였다. 막이 내렸는데도 객석에선 박수가 터지지 않았다. 다시 커튼이 올라갔고 배우들은 인사를 했다. 그래도 객석은 잠잠했다. 작품의 충격이 관객의 몸을 꽁꽁 묶어버린 것이다. "한참이 지나서야 박수가 터졌죠. 온몸에 전율이 흐르더군요."

그날 안석환은 '각별한 순간'을 경험했다. "극 중 인물인 목포 깡패 장정과 완전히 한몸이 됐어요. 커튼콜 때 무대에 나와서야 '이장정에서 안석환으로' 서서히 돌아오더군요. 그때 박수가 쏟아졌죠." 수도 없이 무대에 섰지만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당시 '남자충동'은 매회 매진을 기록하며 화제를 뿌렸다. 바로 그 '남자충동'(12일부터 4월18일까지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02-762-0010)이 7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른다.

◇목포로 간 이유=1997년 안석환은 2박3일간 목포로 내려갔다.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다. 진짜 깡패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남자충동'의 배경이기에 도시의 분위기도 알고 싶었다. 안석환은 거기서 조직폭력배 중간보스를 만났다. 스물여덟살의 젊은이였다. 까만 양복에 특유의 사투리. "나가 질로 듣기 싫은 말이 뭔지 아요? 바로 '양아치''건달', 뭐 이런 거여."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를 묻자 "'사업가'라고 해야재"라고 소리쳤다.

안석환은 그때 '건달의 허세'를 보았다. 바로 '남자충동'의 이장정이 그런 인물이다. 영화'대부'의 알파치노가 삶의 모델이다.'패밀리'를 위한다면서도 가족에게조차 폭력을 서슴지 않는 남자다. 안석환은 "덕분에 큰 것을 작게, 작은 것을 크게 부풀리는 건달의 허상을 제대로 그릴 수 있었다"고 했다.

안석환의 고향은 경기도 파주다. 그런데도 그의 전라도 사투리는 질퍽하리만치 사실적이다. 그는 "요즘 주위 사람들과 통화할 때도 항상 사투리를 쓴다"며 "일상에서 장정이 돼야만 무대에서도 진짜 장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인생을 바꾼 '남자충동'=안석환이 군복무를 마쳤을 때 집안은 엉망이었다. 아버지의 가게가 폭삭 망했다. 가구는 모두 압류됐다. 그는 물류 회사에 들어가 주경야독으로 대학을 마쳤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5년만 시간을 달라. 연극판에 뛰어들겠다"고 선언했다. 부모는 "좋은 직장 놔두고 얘가 굶어 죽으려고 작정했나"라며 완강하게 반대했다. 6개월이나 싸워야 했다.

연극판의 고생은 말도 못했다. "살을 에는 겨울에는 일일이 풀칠을 하며 포스터를 붙이고 다녔어요. 벽보용 찍개라도 있었더라면…." 배우인지 심부름꾼인지 모르게 5년이 흘렀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5년만 더!"라며 더더욱 연극에 매달렸다."남들이 두 시간 연습할 때 저는 여덟 시간씩 했어요. 대학 시절 연극 동아리 활동이 전부였기에 무조건 배운다는 생각으로 덤벼들었죠."

86년부터 97년까지 무려 12년을 그는 가난한 연극배우로 지냈다. "동료랑 맥주를 마시러 갈 때도 '딱 1000㏄만 마시자'고 미리 약속을 했어요. 돈이 없었으니까." 계산할 때 눈치를 보는 일은 아예 일상이 돼버렸다.

그러다 기회가 왔다.'남자충동'에서 보여준 카리스마가 '배우 안석환'의 존재를 알렸다. 같은 해 개봉한 영화'넘버3'마저 대박이 터졌다. 그제서야 그는 '따신 밥'을 먹었다.

◇돌아온 연극판=안석환에게 연극판은 '자궁'이다. 가난했지만 자신을 배우로 길러준 곳이다. 97년 초연 이후 '남자충동'의 재공연은 네 번이나 추진됐으나 제작비 문제로 번번이 무산됐다. 그 때마다 안석환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이번 공연은 그야말로 4전5기인 셈이죠." 그는 '남자충동'을 올린다는 얘기에 두말 않고 연극판으로 돌아왔다.

매일 자정에나 끝나는 연극 작업의 고통도 안다. "그걸 즐겨야죠. 아니면 해낼 수가 없으니까." 그래도 두렵다고 했다.'남자충동'초연 때 그는 30대였다. 지금은 40대다."배 창시(창자)에서 우러나는 연기를 해야 하는데, 지금은 길을 아니까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 연기를 하게 될까봐 두려워요."

그래도 그는 연극의 마력을 안다. "TV 드라마의 연기는 사실 '예술'이라기보다 '기술'에 가까워요." 연극 연기에는 TV와 영화에서 맛볼 수 없는 '문학적 깊이'가 있다고 했다.

그의 아파트 거실에는 지금도 '남자충동'포스터가 걸려 있다. 초연 때 공연장 외벽에 걸렸던 2m짜리 대형 포스터다. 지난 7년간 '남자충동'을 가장 손꼽아 기다린 이는 다름 아닌 안석환이었다.

글=백성호.사진=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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