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각 2층서 라이터 두 개, 불탄 막대기 발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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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후 경찰 감식반원들이 숭례문 화재 현장에서 감식하고 있다. 경찰은 화재 현장에서 발견한 일회용 라이터 2개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감식 의뢰했다. [사진=김성룡 기자]

11일 찾은 숭례문 화재 현장은 처참했다. 밤새 세운 흰색 장막 사이로 시꺼멓게 타버린 숭례문의 잔해가 엿보였다. 화강암으로 쌓은 기단만 멀쩡할 뿐 누각 2층은 폭탄을 맞은 듯 뼈대만 남아 있었다. 화려한 색으로 자태를 뽐내던 단청과 위엄을 갖췄던 지붕은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다.

기단 주변엔 쏟아져 내린 기와 조각들과 타다 남은 나무 잔해가 쌓여 있었다. 매일 수천 명의 관광객이 찾았던 주변 잔디밭은 밤새 뿌렸던 물로 질퍽거렸다.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경찰은 숭례문 남북 두 방향에 놓인 출입구에 폴리스라인을 치고 출입을 막았다. 전·의경들이 지키는 노란색 선 주변엔 시민들의 발길이 하루 종일 계속됐다. 흉물로 변한 ‘국보 1호’를 바라보던 시민들의 입에선 탄식이 터져 나왔다. 몇몇은 하얀 국화를 놓기도 했다. 오후 1시 국화를 놓은 뒤 고개를 숙여 묵념하던 양호일(58)씨는 “수백 년 동안 서울의 ‘얼굴’이었던 숭례문을 잘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든다”며 쓸쓸히 발걸음을 돌렸다.

◇화재 원인=숭례문 화재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 남대문경찰서는 이날 목격자 등을 상대로 화재 원인에 대한 수사를 벌이고 있다. 경찰은 화재 현장에서 2개의 사다리를 발견했다. 경찰은 범행에 사용됐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국과수에 감식을 의뢰했다. 또 중부소방서 오용규 진압팀장은 “화재 발생 후 처음 현장에 출동한 소방대원들이 누각 2층 기둥 옆에서 라이터 2개를 발견했고 약 2m 뒤에서 불에 타고 있는 나무 막대를 목격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막대 옆 기둥이 불에 타 검게 그슬려 있어 방화일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경찰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워 저질러진 방화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일각에선 사다리를 준비한 것으로 보아 고건축물에 대한 조예가 깊은 인물의 소행일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김영수 남대문경찰서장은 “숭례문 공원관리사무소에서 넘겨받은 CCTV(폐쇄회로TV) 녹화 화면에는 사각지대가 많다”며 “방화범을 봤다는 목격자들의 진술을 CCTV로 확인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밝혔다.

◇엇갈리는 목격자 진술=11일 남대문서에 출석한 목격자 이모(49·택시기사)씨는 “평소에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숭례문 옆 남산 쪽 도로에서 갑자기 중년의 남자가 뛰어나와 택시를 잡았다”며 “마침 숭례문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고, 남자는 손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이씨는 “남영역 뒤쪽 숙명여대 입구에 남자를 내려 줬다”고 경찰에 알렸다. 반면 또 다른 목격자 이모(44·택시기사)씨는 “방화범이 불을 낸 뒤 남산 쪽으로 도주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50대로 보이는 남성이 쇼핑백을 들고 숭례문에 올라간 지 1~2분이 지나자 불꽃과 함께 연기가 솟아올랐다”고 진술했다. 일부 시민은 “등산복을 입은 60대 남성이 알루미늄 사다리를 가지고 올라갔다”는 제보도 했다.

경찰은 이날 전기안전공사와 소방서 등과 함께 합동 감식작업을 벌였으나 육안 감식만 했다. 잔해물이 많이 쌓여 있어 정밀 감식을 실시하지 못했다.

글=강인식·이지은 기자 ,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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