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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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1백57세까지 살았다는 대목만 별도로 한다면『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의 허황옥 왕후에 관한 기술은 아주 소상하여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김수로왕과 혼례를 올리기 전 허왕후는 높은 언덕에서 비단 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폐백으로 바친다.
이것은 결혼 전에 신직자를 통해 신에게 처녀성을 바치는 서역(西域)의 종교 관습을 떠올리게 한다.
왕과 왕후는 별궁에서 혼인하여 두 밤과 하루 낮을 보낸 후 대궐로 돌아온다.
이 「두 밤과 하루 낮」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2박3일」(二泊三日)은 요즘의 신혼여행 일정과 맞먹는다. 연옥도 2박3일의 신혼여행 계획을 짰다.김해에서 하루 밤,경주에서 하루 밤과 하루 낮을 보내는 일정이다.
김해는 가락국 땅,경주는 신라의 서울이었다.허황옥 왕후의 후예인 연옥과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朴赫居世王)후예인 박원장이 『삼국유사』의 기술을 더듬으며 각각 조상의 옛 터전을 직접 걸어서 돌아본다는 계획이었다.
신혼여행 준비며 신접 살림살이 마련을 위해 길례는 연옥을 데리고 연일 백화점과 상가 나들이를 거듭했다.
딸 내외를 위한 아늑한 공간을 머리 안에 그리며,그 공간에 배치할 세간살이며 커튼이며 조명기구들을 하나 하나 정성들여 골라 나갔다.
이전엔 별로 관심을 안둔 아기옷 가게서도 길례는 발을 멈췄다.머지않아 이 가게에도 들를 일이 생길 것이다.
깜찍하게 예쁜 옷이며 이불가지가 길례를 절로 미소짓게 했다.
연옥을 키울 때만 해도 이렇게 화사한 아기옷들은 시중에 없었다.양말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 길례는 예쁜 빛깔의 털실을 사서 손수 떠 신기곤 했다.그런 시간이 행복했다.
예쁘고 편리하게 만들어진 옷가지들을 입맛대로 골라 살 수 있게 된 것은 편해진 일이긴 해도 결과적으로는 자식에게 공들이는어머니의 권리가 그만큼 빼앗기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아기옷 메이커로 이름있는 그 가게 안에선 손님 몇이 서성이며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글쎄,그 녀석이 허씨네 종손 아니랄까봐 고추에 점을 찍고 나왔지 뭐야.』 갓난아기 옷을 고르던 여인의 높은 소리에 길례는 눈을 던졌다.
시누이였다.사촌 시누이도 옆에 있었다.
『고모예요!』 연옥도 그녀들을 발견하고 길례의 팔을 흔들었다. 『형님 나오셨어요? 그렇잖아도 연옥이 혼사 일로 찾아뵈려던참이었어요.』 길례는 얼른 다가가 반가워했다.그러나 두 시누이는 얼어붙은 장승꼴로 입을 봉하고 있었다.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들은 대충 인사받더니 허둥지둥 가게를 나가버리고 말았다.기이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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