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로 가게 문 닫고, 화재로 집 잃어도 희망 버리지 않고 옷 만들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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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패션 디자이너 장광효(51·사진)씨는 시련을 겪으면서 더욱 성숙해졌다. 1988년 국내 최초로 남성복 컬렉션을 열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94년 한국 남성복 디자이너로는 처음으로 프랑스 파리 컬렉션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97년 외환위기로 30개 가까운 매장을 정리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0년에는 집에 불까지 났다.

그럴수록 더욱 이를 악물었다. 조용필부터 서태지까지 유명 연예인의 무대의상을 도맡아 했던 그가 2002년 남성복 디자이너로는 처음으로 홈쇼핑에 진출해 재기의 발판을 다졌다. 2005년엔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에 ‘장쌤’ 역으로 출연해 대중적 인기도 얻었다.

그런 장씨가 데뷔 20년을 맞아 에세이집 『장광효, 세상에 감성을 입히다』를 냈다. 9일 서울 청담동에서 그를 만났다.

“지난 20년을 정리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책을 냈어요. 아내(길애령·목포대 성악과 교수)가 ‘책은 함부로 쓰는 게 아니다’라며 말렸지만, 앞으로 20년은 이 일을 더 하겠다는 생각으로 썼어요.”

그는 재기의 원동력으로 긍정적인 자세를 꼽았다. “반지하 작업실에서 일하고, 고양이 사료를 살 돈이 없을 정도로 힘들었을 때도 있었으나 희망을 버린 적은 결코 없었어요.”

화재를 만났을 때 정신이 퍼뜩 들었다고 한다. “차라리 숙연해졌습니다. 평생 모아온 허영이 한 줌 재가 됐으니까요. 마음을 비웠습니다. 대신, 내가 좋아하는 옷을 꾸준히 만들었죠. 컬렉션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어요. 2보 후퇴하면 3보 전진하자고 마음먹었죠.”

그는 어려운 시절을 거치면서 단순함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전엔 힘들면 놀면서 풀었어요. 그러다 보니 에너지 소모가 너무 심했어요. 삶에 ‘가지치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요즘에는 단순하게 살아요. 개를 산책시키며 운동장을 뛰고 빨래도 하면서요. 그러면 스트레스가 자연스럽게 해소되더군요. ”

‘스타일’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 그는 의외로 간단히 대답했다. 화려함의 대명사로 통하는 패션디자이너의 정의치곤 담백했다.

“라이프 스타일이 스타일을 만든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교양이 중요하죠. 영화배우 윤정희씨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굳혔습니다. 남편인 피아니스트 백건우씨의 옷을 해줄 때 봤는데, 할인점에서 산 옷을 윤정희씨 스타일대로 수선해서 입히더라고요. 너무도 멋지고 우아했습니다. 사람이 명품이어야 한다는 얘기죠. 적당히 유행을 따르면서도 자기 고유의 감성을 잃지 않는 게 핵심이라고 봐요.”

장씨는 후배 디자이너들이 마음껏 패션쇼를 할 수 있도록 복합문화공간을 만들어주는 게 남은 꿈이라고 말했다. 

임주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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