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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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연옥은 노마님에게 있어 초면은 아니다.
원장 청년이 이미 데려와 인사시켰고,그 후에도 몇차례 혼자 와서 노마님 말벗 노릇까지 한 것 같았다.
『딸은 잘 키웠네.손끝이 야무지고 속도 꼭 찼어.요즘 애들 같지 않아.』 이미 자기네 식구로 단단히 꼽고 있는 말투였다.
『애들이 올 때가 됐겠는데….』 노마님이 한길 쪽을 내다봤다. 약초밭 너머 개울이 있고,그 개울 건넌 곳에 한길이 이어져있다. 『애비가 병원에 들러 함께 오기로 했습니다.』 시어머니감이 연옥을 데리고 부엌으로 가며 말했다.
「나체총각」도 올 모양이다.당연히 상면할 것으로 생각은 했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노마님은 친정동생 결혼 상대로 일찌감치 길례를 점찍고 있었다.길례 아버지 생각도 같았다.그것은 두사람 사이의 은밀하나 확고한「신념」같게도 보였다.
아내가 가출한 후 줄곧 홀아비살이해온 중년 남자는 음식 솜씨깔끔하고 다정한 이웃 안주인에게 항상 가정적인 따사로움을 느꼈을 것이다.그것이 어느새 이성에 대한 감정으로 변모해갔음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노마님 남편인 한약방 원장 아저씨는 몸이 약했다.그가 아버지인 선대 원장 할아버지보다 먼저 돌아간 것은 길례가 대학에 갓입학했을 무렵이다.
탈상 며칠 후의 일이었던가.길례는 휴강 바람에 일찍이 집에 돌아왔었다.
아버지 방에서 인기척이 났다.무심코 다가서는데 여자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아주머니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그 울음섞인 목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분명했다.
발소리를 죽이고 자기 방으로 되돌아가 숨었다.착잡했지만 탓할생각은 없었다.두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그 절실한 목소리는 길례의 머리에서 앙금처럼 내내 지워지지 않았다.「나체총각」과 맺어지지 못한 데는 이 목소리의 작용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두사람 관계가 유지됐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만약 그랬다면 아버지에게 있어 그것은 큰 축복이었을 것이다. 노마님은 아직 화사하다.일흔을 훨씬 넘긴 나이지만 웃으면 바늘 끝같은 보조개가 파이는 얼굴이 나이보다 한참 젊어 보인다. 『작약(芍藥)을 많이 가꾸신다면서요? 오월엔 정말 아름답겠네요.』 길례는 노마님의 안내로 약초원을 돌아봤다.밭두렁에 냉이.꽃다지.쑥들이 여린 새싹을 내밀고 있다.
봄나물 몇송이를 캐고 우물 가에서 씻는데 등 뒤에서 조신한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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