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는 자식에게 ‘은밀한 유산’을 남긴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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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1900년대 일제 강점기, 서울과 멀지 않은 고라실과 너븐들이라는 마을에 살고 있는 두 집안사람들 이야기로 시작된다. 대대로 정승판서가 귀하지 않았던 고라실과 향반이지만 넉넉한 살림에 다산성을 큰 복으로 여기고 있는 너븐들. 사사건건 부딪치며 반목하던 두 집안은 고라실의 종손 이정우와 너븐들의 여식 난설이 사랑하는 사이가 되며 화해의 기운이 감돈다. 그러나 혼인 전 이정우는 독립운동을 하다 옥사하고 두 집안의 화해는 무산되고 두 집안의 세혐의 고리는 더욱 굳게 채워져 현대까지 이어지는데…….

출간하는 작품마다 새로운 소재와 주제 의식으로 독자에게 다가오는 중견작가 이명인이 이번에 내놓은 작품은 현대와 과거를 오가는 역사물이다. 작가는 4대에 걸쳐 얽힌 두 집안의 숙명적인 사랑과 인연 등을 전면에 내세우고, 함부로 입 밖에 꺼내기 어려운 ‘족보’의 실체에 대한 의문을 후방 배치하여, 우리 사회에서 암암리에 애지중지하는 가문, 혈통 등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양반과 상민이라는 신분 계급이 없어진 요즘은 경제력이나 권력이 또 다른 잣대가 되어 계급을 나누고 있다. 그런데 경제력이나 권력도 어느 날 갑자기 부동산 갑부가 되어 얻을 수 있는 소위 졸부의 경제력이나 개천에서 난 용의 권력으로는 상류 사회에 끼어들 수 없다. 이른바 출신 성분이 중요하다. 그래서 그런지 시중에 날고 기는 우리 시대 ‘용’들은 금상첨화 격으로 출신 성분을 증명해줄 대단한 ‘족보’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백성의 몇 퍼센트나 족보를 꿰고 사는 ‘양반’이었을까를 생각하면 이에 대해 조심스럽게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사실, ‘족보’에 대한 의문은, 뿌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이를 계승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훌륭한 ‘집안’들에게 누가 될 수 있는 것이라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작가는 뿌리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함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을 위해 ‘족보’를 가공하게 만드는 이 사회, 즉 ‘양반 족보’ 권하는 우리 사회에 일침을 가하고자 이렇게 용감하게 어려운 주제를 꺼내 들었는지 모른다.

“용은 신성했다. 그건 믿음이었다.
생물학적으로 용은 용을 낳는다. 한때 개천에서 돌연변이 용이 나기도 했으나 개천은 모두 복개되었다. 시멘트 아래 고여 있는 개천에 호스를 박아 썩은 물을 뿜어 올리는 건 TV상자와 신화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주역에 ‘혹약재연(或躍在淵)이면 무구(无咎)니라’ 하는 궤사가 있다. 못에서 자란 이무기가 용이 될 수 있을까 하여 도약해보다 여의치 않으면 다시 연못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 연못은 오랫동안 가문이었으나 격변기에 그 연못에도 변동이 일어났다. 새로운 연못이 생겼고 기존의 연못들은 더 커지거나 고갈되었고, 고색창연함으로 부패를 감추었다. 분명한 건 용이 되려는 이무기는 연못에 살고, 연못은 집이나 논이나 밭, 산이나 공장, 구멍가게에 비해 너무 적다는 사실이다. 구멍가게 옆이나 공장 옆으로 나란히 흐르던 개천이 마른 뒤, 사람들은 꿈 없이 젖은 자리를 뒤척인다.”
- 작가의 말 중에서

* 도서 : 은밀한 유산
* 저자 : 이명인 지음
* 출판사 : 대교베텔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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