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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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당(以堂)미인도의 여인처럼 가운데 가르마로 단정히 머리를 빗어붙인 고전적인 모습이다.
『아리영씨 어머님이신가요?』 『영국의 도자기 마을에 갔을 때기념으로 만든 겁니다.』 아리영 아버지는 초상접시를 보지 않고대답했다.
『아리영씨 어머님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세요.』 『…뭘 알고 싶으십니까?』 『모두 다.』 정말 그녀의 모든 것이 궁금했다.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의 24시간이 어떤 것이었는지,이를테면 섹스에 대한 대응이 어땠는지 까지도 알고 싶었다.
천박한 호기심이라고 반성할 여유도 없었다.아리영 아버지의 과거를 독점해온 여인에 대한 강한 궁금증.그것은 아리영 아버지의과거를 길례의 인생에 송두리째 편입시키는 동화(同化)욕망의 한표현인지도 몰랐다.
『한마디로 완벽주의자였습니다.뭐든지 놓인 자리에 놓은대로 없으면 몹시 언짢아했어요.뛰어난 밸런스 감각은 있었지만 모든 변형을 두려워했습니다.아니,미워했다고나 할까….』 그 이상 얘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듯이 아리영 아버지는 입을 다물었다.
카레가루를 버터로 볶는 향기가 부엌을 고소하게 메웠다.
맵싸하고 따끈한 카레 라이스 저녁은 입맛을 돋웠다.두 그릇이나 비우고난 아리영 아버지는 식후의 커피를 끓였다.능한 손놀림으로 알커피를 갈아 유리 주전자에 담는다.갈색의 뜨거운 커피 물이 차츰 위쪽 유리알에 옮겨가고,진한 향기가 길 례의 가슴을풍요감으로 채운다.
『그래 「정읍사」 추적전은 잘 돼가고 있습니까?』 길례 잔에커피를 따라 주며 아리영 아버지는 화제를 돌렸다.
『마지막 대목에서 헤매고 있어요.「어느다 노코시라」라는 구절인데…「어느다 노코시라/어긔야 내가논 졈그랄세라/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로 「정읍사」 가사는 끝나고 있지요.』 『그「어느다」의 「ㆁ」자는 「ㅇ」가까운 「ㄱ」소리였다지요? 「」라면 「ngi」음인 셈이니까 「어느다」는 「어능기다」에 가깝게 발음됐다고 볼 수 있겠네요.』 한글은 창제(創製) 당시 28자였다.이 중 「ㆁ」「ㆆ」「ㅿ」과 「아래 아」자라고 불린 「ㆍ」가 없어져 현재로는 24자다.「어느다」의 「ㆁ」도 사라진 글자,사라진 소리 가운데 하나다.「ㆆ」은 「ㅎ」보다 강한 「f」에해당되고,「ㅿ」 은 「ㅅ」과 「ㅈ」의 중간쯤 되는 「z」,「ㆍ」는 「ㅏ」와 「ㅗ」의 중간 정도의 「oa」에 가까운 소리라고길례는 대학 때 배웠었다.
『이 사라진 글자를 모두 되살리면 좋지 않을까요? 외국어 표기할 때 아주 편리할텐데요.』 외교관 출신이어서 언어에 대한 성찰에 역시 남다른 데가 있다.
『어느다…어능기다…아,혹시….』 그는 뭔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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