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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에서 본 대우의 세계경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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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아, 대우의 나라.” “어떻게 대우를 아시지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고속도로를 건설한 업체지요.” “어디예요?” “이슬라마바드와 라호르 간 고속도로, 대단합니다. 여기에서 대우 모르면 이상하지요.” 그는 껄껄 웃었다.

다음날 현지 최대 수공예품 판매회사 중 하나인 ‘파키스탄 수공예 하우스’를 찾아 라술 칸 사장에게 명함을 건네며 경기가 어떤지 물었다. 그가 서툰 한국어로 “안녕하시요?” 한다. “어디서 한국말을 배웠나요?” “일주일에 한 번씩 대우 고속버스를 타고 라호르까지 출장 다니지요. 요금은 다른 버스보다 두 배나 비싸지만 서비스가 최곱니다. 그래서 한국어 공부를 하게 됐고 지금은 매년 수십만 달러어치 수제품을 한국에 수출하고 있습니다.” 그는 삼미 파키스탄 운수법인이 2004년 대우로부터 인수해 개명한 삼미·대우 익스프레스 버스를 아직도 대우 버스로 기억하고 있었다(이 회사는 370여 대의 버스가 37개 도시를 운행하는 파키스탄 최대 운송업체다).

2005년 파키스탄 한 신문사가 자국 내 모든 회사의 브랜드 인지도 조사를 했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이 “경제, 경제” 하며 외자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현지 국내외 주요 기업 100여 개가 거론됐는데 놀랍게도 삼미·대우 익스프레스 가 1위였다. 코카콜라와 맥도널드도 ‘대우’의 벽을 넘지 못했다. 이후 현지에선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대우 이름은 안다”는 우스갯소리가 생겨났다.

대우의 명성이 하루 아침에 생겼을 리 만무하다. 1992년 파키스탄 정부는 수도와 제2 경제도시인 라호르를 잇는 340km 고속도로 공사 국제입찰을 실시했다. 한데 입찰에는 대우와 터키의 한 건설업체 단 두 회사만 응했다. 치안 문제, 이질적인 이슬람 문화에다 가난한 파키스탄 정부의 공사대금 지불조건이 좋지 않았던 탓이다. 여기에다 현지 토목공사 협력업체가 거의 없어 정상적 공사는 불가능해 보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공사는 대우가 맡았다.

93년 300여 명 정도가 현지발령을 받았는데 ‘공사가 완벽히 마무리될 때까지 귀국할 수 없다’는 단서가 붙었다. 현지 조건이 열악하니 배수진을 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당연히 공사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한 달에 휴일은 딱 두 번으로 제한됐고 매일 10시간 이상 공사가 진행됐다. 포클레인이나 트럭이 부족해 소가 끄는 쟁기나 수레까지 동원됐다. 현지인은 이런 대우 직원을 ‘외계인’이라 불렀다. 한번은 대우 직원이 낮잠자는 현지 인부에게 “너무 게으르다”고 말했다가 이들의 집단행동으로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그렇게 대우맨들은 5년반 동안 이 나라 최초의 고속도로를 이어 나갔다. 97년 말 340㎞의 6차선 도로가 완공됐을 때 당시 나와즈 샤리프 총리는 자신이 직접 차를 몰고 도로를 완주하며 기뻐했다. 그리고 “경제개발을 위한 첫 동맥이 생겼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듬해 대우의 ‘고속도로 건설기’는 파키스탄 초·중학생 교과서에 실렸고 아직도 캔두(Can-do) 정신의 화신으로 회자되고 있다. 물론 대우는 이 공사로 현지 운수업체 운영권과 적지 않은 돈을 벌었다.

지금 파키스탄은 어지럽다. 주민들은 종족·종파 간 테러와 전쟁으로 항상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아간다. 그러나 한국인을 보면 대우 얘기를 하고 친구처럼 대한다. 그리고 한국 기업을 대우의 분신쯤으로 여기며 부러워하고 좋아한다. 수 백억, 아니 수 천억 달러를 쓴다 해도 결코 얻기 어려운 그 마음을 대우는 고속도로 건설 하나로 얻은 것이다. 대우의 세계경영은 그렇게 파키스탄에 남아 있었다.

최형규 홍콩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