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코펜하겐-서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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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세계 제1의 고아수출국이 올림픽을 개최한다」-.
88년 서울올림픽이 확정됐을 때 한 서방언론이 이런 제목의 기사를 실었던 기억이 난다.우리들에겐 우리의 자존심을 한마디로뭉개버리려는 악의적 독설(毒舌)로만 들렸지만 서구인(西歐人)들로서는 이 모순이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 을 것이다.내용인즉 조금도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로부터 벌써 7년.그러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인간안보」라는 새로운 개념을 내걸고 세계 정상들이 모인 덴마크의 수도코펜하겐 회의에 우리는 떠오르는 경제강국이란 자부심을 갖고 참여하고 있지만 오늘도 같은 공항엔 우리 고아들이 함께 트랩을 내리고 있다.
우리의 국민총생산(GNP)규모는 지난해 말로 세계 15위.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시대도 멀지 않았다.내년에는 경제선진국들의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도 가입하게 되어 있다.
이만하면 자타(自他)가 공인할만한 세계적 경제강국 이다.바로 그 경제강국이 여전히 고아수출국이란 오명(汚名)도 함께 지녀야하는 이 기막힌 모순이야말로 우리의 삶의 질이 어떠하며,우리 사회복지의 현주소가 어디인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엔 개발독재시대가 만들어낸 복지에 대한 미신(迷信)들이 아직도 널리,그리고 뿌리깊게 박혀있다.그 첫째가경제성장을 위해선 복지를 뒤로 돌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둘째는 경제성장을 하면 복지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셋째는 선진국들의 복지재정위기나 복지병으로 미루어 볼때 복지는 서두를 일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경제성장과 복지가 제로섬의 관계가 아니며,복지가 결코 단순한소비가 아니란 점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현재의 복지선진국들이복지시책을 펴기 시작한 것은 고상한 이상(理想)을 실현코자 한것만은 아니었다.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회안정 도,경제성장도 불가능하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경제성장이 복지를 저절로 실현해준다는 것이 사실이 아님은 누구보다도 우리들이 잘 알고 있다.
先경제성장만 추구하다간 가장 최선의 결과를 얻는다 해도 국가나 기업은 부자인데 정작 국민은 가난한 일본(日本)꼴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나라는 GNP규모에선 세계 15위라지만 사회복지재정지출 비율 면에서는 세계70위에 머무르고 있다.이런 형편에서 복지국가들의 재정위기나 복지병을 말하는 건 집없는 거지가 집에 불날걱정부터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남북분단으로 인한 국방비부담 때문에 복지는 어쩔 수 없이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이스라엘과 대만은 우리보다 더 많은 국방비부담을 지고 있으면서도 우리보다 더 다양한 사회복지프로그램을 갖고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선「국가경쟁력」「국제화」「세계화」가 강조되면서 경제논리와 경쟁원리가 모든 판단의 유일한 기준이 되고 있는분위기다.이는 사회발전은 커녕 오히려 사회를 약육강식의 정글化하고,더 나아가선 국제적 갈등마저 일으킬 가능성 이 큰 위험한사고방식이다.코펜하겐에서의 유엔 사회개발정상회의(WSSD)는 脫냉전이후의 바로 이러한 새로운 갈등을 슬기롭게 극복하자는데 그 근본 목적이 있다.
우리가 적어도 총량규모에선 경제적 성공을 거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그런이상 이번 회의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경제규모에 걸맞은 경제적 기여를 후발국에 해야 마땅하다.그러나 그것이 자만심을 불러일으켜선 안된다.더 더구나 이제까지의 경 제개발이 제3세계의 모델인양 으스대는건 철없는 짓이다.93년 세계은행은「동아시아개발보고서」에서 국가주도형의 한국 경제발전이 제3세계 모델로서는「필요하지도 않고 적절하지도 않다」고 일침을 놓은바 있다. ***競爭力이 다 아니다 코펜하겐에서 우리는 가르치려 하기 보다는 배워야 한다.「인간안보」가 단지 경제력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삶의 질」을 말하는 포괄적 개념임을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복지국가 덴마크에서 회의가 열린 것은 시사적이다.복지도시 코펜하겐의 시각으로 서울을 봐야지 서울의 시각으로 코펜하겐을 볼일은 결단코 아닐 것이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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