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래기자의현장] 피아노 공장에 차 바퀴를 달아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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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동차건 피아노건 만든다는 건 같지 않겠나.” ‘자동차 맨’에서 ‘피아노 맨’으로 변신한 영창악기의 박병재(66) 부회장이 2006년 5월 취임 때 한 말이다. 그리고 1년 반이 지난 지금 영창악기의 생산성은 30% 이상 향상됐다. 도대체 그가 어떤 재주를 부린 것일까.

박 부회장은 현대차에서만 35년간 근무했다. 피아노 제조는 당연히 생소했다. 대표이사직을 제안받은 그는 한동안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영창악기를 인수한 정몽규(46) 현대산업개발 회장의 간곡한 부탁과 함께 경영 전권을 줄 테니 한번 해보라는 말에 용기를 얻어 수락했다. 취임 뒤 그가 추진한 첫 작업은 피아노 제조를 자동차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자동차 생산라인은 100여 년 전 미국 포드사의 컨베이어 생산 방식 도입 이후 제조에선 지구상에서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창악기 인천공장은 원래 4개 생산 라인이었다. 2개 라인은 직립피아노를, 2개 라인은 그랜드피아노를 만들었다. 그런데 피아노는 소량 다품종 생산이라 새 모델을 낼 때마다 조립 작업을 몇 단계씩 더 넣어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동선이 얽히고 설켜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작업자와 부품, 폐자재로 공장 안이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작업 효율성은 그만큼 떨어졌다. 그래도 50년 동안 이런 관행을 고수해 왔다. 다른 악기 회사들도 마찬가지다.

박 부회장은 어지러운 공장 내부를 둘러본 뒤 먼저 동선을 단순하게 긋기로 했다. 4개 생산 라인을 직립피아노·그랜드피아노 라인 2개로 줄였다. 생산 라인에서는 ‘피아노의 기본형 제품’만 만들도록 했다. 이를 위해 자재와 부품을 표준화했다. 자동차 공장처럼 작은 부품 여러 개를 표준화해 중간 부품 단위로 조립하는, 이른바 모듈화를 추진했다. 지그재그로 얽혔던 작업 방식을 일렬 방식으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이래서 가능했다. 동선은 한 발짝이 넘으면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는 ‘자동차 생산 철칙’을 따랐다.


하지만 난제도 있었다. 소량 다품종 생산이 골칫거리였다. 얼마 뒤 박 부회장은 아이디어를 내 브랜드별로 생산 날짜를 달리 했다. 예컨대 이번 주는 피아노의 ‘108번 모델’을, 다음 주는 ‘131번 모델’을 생산하는 식이다. 과거에는 기본 4개 라인에서 108번 생산 공정과 131번 생산 공정이 함께 이뤄져 복잡했다. 이런 개선은 ‘콜럼버스 달걀’과 같은 사고의 전환이었다. 이후 생산성은 30% 이상 좋아졌다.

공장 면적을 절반 가까이(6897㎡→3593㎡) 줄였다. 라인을 줄이다 보니 생산직 인력도 40% 이상(175명→104명) 감축할 수 있었다. 피아노 한 대를 생산하는 데 걸리는 시간(리드 타임)이 45일에서 30일로 짧아졌다. 정몽규 회장은 현장을 보고 “피아노 공장을 정말 차 공장과 똑같이 만들어 놨네”라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김시래 기자

◇영창악기=1956년에 설립, 외환위기로 워크아웃을 당한 뒤 졸업했으나 2002년 다시 워크아웃되기도 했다. 2004년에는 삼익악기에서 인수했으나 공정거래위원회의 독점금지법에 따라 취소됐다. 2006년 현대산업개발에서 최종 인수했다. 현재 국내 피아노 시장의 55%를 점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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