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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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입영통지서가 날아든 것은 1월 말의 어느 화요일 오전이었다.
우리집에 오는 우체부는 11시쯤에 다녀가고는 했는데,그날은 어찌된 일인지 10시가 조금 지나서 우체통에 우편물을 집어넣고 가버렸다.나는 마침 담배를 사러 집근처의 구멍가게 에 다녀오는길이었는데,병무청장이 내게 보낸 우편물에는 1995년2월27일9시까지 용산역에 집결하라는 통지서가 들어 있었다.아직 입영일까지는 정확하게 32일이 남아 있었다.그동안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를 따져보았다.꼭 해야 할 일이 없는 것까지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다는 사실은 나를 맥빠지게 만들었다.
자정이 넘어서야 나는 샤워를 하고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PC의 파워 스위치를 눌렀다.내가 자판을 두드리는대로화면에 글자들이 떠올랐다.그건 마치 내 마음 속에 저장된 추억의 스위치를 켠 것과 같았다.
「우리는 굳이 우리에게 적용된 죄목이 어떤 건지를 따지지 않기로 했다.」 고교 2학년 시절의 봄,써니와 함께 캠핑을 갔다가 말썽이 나서 정학을 당하던 장면부터 시작하였다.나는 재미있게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우리들이 겪었던 혼돈과 방황과 우울이 처음부터 너무 드러나서는 안된다고 작정하였다.그건 단지 기교상의 문제였다.그날부터의나는 거의 밤과 낮을 거꾸로 살며 소설쓰기에 매달렸다.잊고있었던 많은 장면들과 그때의 어떤 말 한마디가 문득 떠올라서 스스로 놀라기도 하면서.
일주일에 한번씩 용인의 써니에게 면회가는 일만은 거르지 않았다.써니는 차츰 예전의 써니처럼 농담도 하고 맑게 웃기도 하였다.가령 내가 지난 몇년 동안의 일을 소설로 쓰고 있다고 말하니까 써니가 그랬다.
『겁나.니가 날 어떻게 쓸지 말이야.차라리 조연쯤으로 써줘.
화내지 않을게.정말이야.』 『알았어.써니 니 말대로 할게.정말이야.』 써니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군대 가는 거야…?』 나는 놀랐지만 그걸 표정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렇게 됐어.어차피… 누구나 가야 하는 건데 뭐.』 써니는더 말하지 않고 환자복에 붙은 실밥같은 걸 찾아서 떼어내고 있었다.써니의 손가락은 희고 가늘고 길었다.써니는 더 떼어낼 실밥이 보이지 않자 고개를 숙인 채 배꼽 근처의 단추를 두 손으로 만지작거렸다.써니의 손놀림을 보면서 나는 정말이지 죄책감 때문에 그 자리에서 달아나고 싶었다.
『잘했어.어차피….』 써니의 손등에 눈물방울이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어차피 다른 길도 없으니까….』 『병원에서 나오면… 이번엔니가 날 면회와줘야 한다구.신애라처럼 말이야.기다릴게.나도 차인표처럼 말이야.』 그날밤에,나는 소라가 있는 용호도로 가서 며칠 지내고 올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결국 그러지 않기로 했다.소라를 만난다 해도 달리 할 말도 없을 것 같았고,또 용호도까지 간다는 게 귀찮았다.어차피 행복과 불행은 철저하게 각자의것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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