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품위있는 '言·官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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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프랑스의 장피에르 라파랭 총리와 일간지 르몽드 간의 정중하면서도 날선 최근 논쟁이 여러 모로 흥미롭다.

르몽드는 주초 1면과 문화면 등 4개 면을 통해 라파랭 정부의 문화정책을 심층분석했다. "개혁의 일환이라고는 하지만 문화 예산의 삭감은 결국 문화창달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가 주된 논조였다. 하지만 정작 라파랭 총리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라파랭과 문화계 사이에 이혼이 성사되다'라는 제목이었다.

라파랭 정부와 문화계 간 갈등의 본질은 '문화예술계 비정규 근로자들에 대한 실업수당 삭감'이다. 프랑스 정부는 그동안 공연이 없는 기간 실업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는 비정규 근로자들에 대해 연간 3개월만 일하면 나머지 9개월간 실업수당을 지급하는 혜택을 부여해 왔다. 그러나 라파랭 정부가 지난해부터 비정규직의 의무 근로기간을 15일~1개월 연장하는 방안을 추진하면서 문화계의 거센 반발에 직면해 왔다. 유럽 최대의 연극축제인 아비뇽 축제가 지난해 비정규 근로자들의 파업으로 취소될 정도였다.

라파랭 정부의 개혁정책은 경기침체와 유럽연합(EU) 차원의 재정적자 축소 압력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조치였다. 상당수 프랑스 국민의 지지도 받고 있다. 그런데도 르몽드가 다분히 선정적인 제목으로 공격하자 라파랭 총리가 발끈한 것이다.

반면 대응은 차분했다. 라파랭 총리는 보도 다음날 르몽드 사장 앞으로 독자투고 형식의 항의서한을 보냈다. 그는 편지에서 "르몽드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있다"며 "극단주의가 사고의 위축을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라파랭 총리는 지난해 여름에도 살인폭염에 대한 정부 조치를 꼬집은 AFP통신에 항의 편지를 보냈다.

르몽드는 라파랭 총리의 편지 전문을 1면 하단에 비중있게 실었다. 총리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뜻의 표현이다. 르몽드의 1면 하단은 전.현직 총리, 장관들의 투고가 단골로 들어가는 자리다. '논란이 있다면 공개적 논쟁의 멍석을 펼치자'는 뜻으로 마련된 난이기 때문이다. 라파랭 총리의 말대로 "(싸움보다는) 문제를 함께 풀어가야 한다"는 프랑스식 해법이기도 하다.

박경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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