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銀法 개정案 뒷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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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한은은 물론 전 금융계에 큰 파문을 불러온 중앙은행 개편안이발표되던 21일 김명호(金明浩)한은 총재는 바빴다.
오후에는 청와대에 들어가 김영삼(金泳三)대통령과 독대(獨對)했고 그에 앞서서는 은행.증권.보험감독원 등 3개 감독원장,홍재형(洪在馨)부총리와 점심을 같이 했다.
이 자리에서 洪부총리는 이날 아침 金대통령에게 보고한 한은법개정 방향과 금융감독원 설립 계획을 미리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후 한은과 은행감독원에서는 노조와 직원들의 강한 반발 속에서도 공식적인 입장은 나오지 않고 있다.전 조직이 하나가 됐던 지난 88~89년의 한은 독립 논쟁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한은의 임원.간부들은 함구(緘口)하고 있고,마침 이날저녁 호텔신라에서 있은 이코노미스트클럽 초청 강연에 연사로 나선 金총재는 한은 독립에 관한 질문을 받고도 「무소신」으로까지비쳐질 만큼 한사코 입을 봉했다.
한은의 이같은 침묵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일견(一見) 급작스런 것으로도 보이는 재경원의 한은법 개편안발표가 실은 청와대와의 교감(交感)을 바탕으로 치밀한 준비 속에서 진행된 것이고 한은 임원.간부들도 이런 분위기를 감지,드러내 놓고 반대 입장을 취하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으로 해석되고 있다.
재경원이 한은법 개정 작업에 본격 착수한 것은 정부조직 개편작업이 거의 일단락된 지난 1월 초.
洪부총리는 인사가 마무리될 때 쯤 해서 작업 착수를 지시했고중앙은행 제도의 개편 방향에 대해서는 이미 청와대 측과 의견 일치를 본 상황이었다고 한다.
재경원이 세운 개편의 기본 원칙은▲한은의 기능에 관한한 「법(法)대로하자」는 것과▲「공공부문의 생산성 향상을 위해 감독기관을 묶자」등 크게2가지.
「법대로 하자」는 것은 「선진국처럼 모든 경제 정책의 최종 책임은 행정부가 갖는 현 체제에서 통화정책의 집행권과 감독권을모두 중앙은행에 맡길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고 한 관계자는 설명했다. 금융감독원 신설 문제는 각 금융권 간의 유기적인 연계감독이 불가피한데다,금융권의 겸업주의(universal banking)에 대비해 감독체계의 일원화가 불가피하다는 판단이었다. 이에 따라 당초 미국 유학을 떠나기로 돼 있던 재무부 출신K서기관은 갑자기 내정 인사가 취소되고 대신 조세연구원 파견 발령이 났다.「조용히」 관련 작업을 추진하라는 지시와 함께.
K씨는 지난 88~89년 재무부와 한은이 한은법 문제를 둘러싸고 팽팽하게 대립했을 당시 이재국 금융정책과 주무 사무관으로한은법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뤘던 금융분야의 베테랑.지난 92년금융실명제 준비 작업 때는 과천에 아파트 한 채를 빌려 작업을했으나,이번에는 일부러 장소를 바꿔 서울 강남에 있는 호텔을 이용했다.
일부 직원들은 출장갔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비워야 하는 등우여곡절도 있었다.
구체적인 안을 마련한 재경원이 최종 순간 가장 고심한 부분은이를 터뜨리는 시기.
일단 준비 작업은 끝냈으나 이번 임시국회에서 정부안을 본격적으로 들고 나가느냐 하는 데 대해서는 입장을 정리하지 못했다.
그러는 도중 여야가 2월중 임시국회를 열기로 합의하고,또 경제학자 1천여명이 「한은 독립」을 요구하는 서명을 한데다 보안이 점점 더 어려워지자 서둘러 공식 입장을 발표하게 됐다는 후문이다. 金王基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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