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환하면 끝입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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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정양주(1960~) '환하면 끝입니다' 전문

하늘이 두 뼘쯤 되는 산골짜기 집 마당에
백촉짜리 백열등 주렁주렁 달렸습니다

저 집에서 다시 불빛 새어나올 일 없습니다
장독대 항아리들 다시 빛날 날 없습니다
툇마루에 걸터앉을 엉덩이 없습니다

시골집 환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마지막 불빛입니다



내가 잠시 머물렀던 섬진강변 제월리 마을은 세 집에 두 집이 빈집이다. 사람이 들어 있는 집의 경우도 대부분 할머니나 할아버지 한 분씩만 산다. 산골짜기 집 마당에 백열등들이 주렁주렁 환하게 밝혀지면 축제다. 고단했던 한 생애가 끝나고,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살았던 살붙이들이 찾아와 액자 속의 얼굴 앞에 소주 한 잔을 붓고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다가, 새벽녁엔 언젠가 자신들도 들어설 그 길로 서둘러 떠나간다. 살아서 먹었던 밥들, 장독 안의 묵은 된장과, 토방 시렁 위의 사진틀과 수저통 속 몇 벌 수저들과 이별할 뿐인데…. 백열전구 불빛 환하게 빛나는 이 축제는 슬프다.

곽재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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