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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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남자 친구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담길을 가며 아리영이 물었다. 질문의 뜻을 헤아리기 어려워 길례는 머뭇거렸다.
『저희 아버지,괜찮은 친구가 되실 거예요.』 친구? 앙드레 모루아는 피차 이성(異性)을 의식하지 않는 경우에만 남녀간의 우정은 성립될 수 있다고 했다.이미「한 남자」로 사랑하게 된 사람이 어떻게 친구일 수 있는가.
담 그림자가 길을 따라 진하게 깔려있다.하얀 담이 새삼 치켜져 보인다.
저 높은 장벽.
장벽은 넘어가면 된다.넘어가지 못하게 하느라고 마련된 것이 장벽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넘어가는 행위를 전제로 한 물리적인 존재다.도전을 전제로 하여 마련된 것을 도전하는 일은 차라리 순리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내의 육체에 두른 「장벽」이 있었다.정조대(貞操帶)다.
11세기,십자군 기사들은 싸움터로 떠나며 아내의 허리에 정조대를 채웠다.무거운 무쇠로 만든 잠금 장치.15세기의 유럽에서는 장사꾼들도 장기 여행에 대비하여 활용했다.
결혼 초,파리 출장을 다녀온 남편으로부터 길례는 괴이한 선물을 받은 적이 있다.정조대를 정교하게 본떠서 만든 은반지였다.
정조대의 모양새를 본 것은 그때 처음이다.
요도구(尿道口)와 항문 자리만 파두고 질구(膣口) 언저리는 굳게 막아놓았다.자물쇠는 허리부위에 채워진다.
남편들은 이 자물쇠를 단단히 잠그고 나서 열쇠는 자신이 가지고 길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형틀같은 정조대로도 정조는 별로 지켜진 것같지 않다.아내들은 저마다 여벌쇠를 만들어 쉽사리 그 형틀에서 자신을해방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 남자들이 고안해낸 가장 어리석고 우스꽝스런 물건 정조대.아내 스스로 지키려들지 않는한,천하없는 잠금 장치도 쓸모없는 것을….
『어디서 산 거예요?』 『센강 옆의 술집.옛날 지하감옥이었던곳이래.지금도 지하에 그대로 보존돼 있어.』 정치범을 수용한 감옥이었다 한다.
감옥 터의 술집엔 단두대(斷頭臺)랑 각종 형구(刑具)와 함께정조대가 전시돼 있었는데,은반지는 그중의 하나를 본뜬 것이라 했다. 정조대가 왜 형구와 나란히 감옥터에 있는지 알 수 없으나,여성의 섹스를 가둔 감옥이란 점에서 제대로 자리잡음하고 있다고나 할지.
감옥,정조대,남편,그리고 아리영 아버지….담장 아래서 길례는언뜻 현기증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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