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여성 언론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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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지난해 뉴욕 타임스는 창사 이래 최악의 기사 표절.조작 사태에 직면했다. 소속 기자가 수십건의 허위 기사를 작성해 온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150년 넘게 지켜온 신뢰도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신문사는 '소방수'로 질 에이브러햄슨 워싱턴 지국장을 선택한다. 뉴욕 타임스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을 편집국장에 임명한 것이다. 경영을 이끄는 재닛 로빈슨 외에 또 한명의 여성에게서 비전을 찾고자 한 셈이다.

여성 언론인의 역할에 대한 기대는 이렇게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일이 험하다는 이유로 쌓아왔던 금녀(禁女)의 벽은 허물어지는 중이다.

특히 신문산업의 경우 여성과 젊은층을 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여성들의 '감각'에 더욱 기댈 태세다. 조만간 '여기자''여성 경영인'앞에 붙인 '여성'이란 구분은 용도 폐기될지 모른다.

◇한 획을 그은 맹렬 여성 언론인=뉴욕 타임스에 앞서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2002년 7월 카렌 엘리엇 하우스 국제담당 사장을 발행인으로 임명했다. 경영실적 부진에 대한 주주의 압력이 거세지자 히든 카드로 내세운 것이다. 피터 칸 다우 존스사 회장의 부인인 그녀는 1984년 후세인 요르단국왕 인터뷰로 퓰리처상을 받고 국제판 사장 등을 거치면서 기자와 경영자로서의 자질을 모두 인정받았다.

2001년 작고한 캐서린 그레이엄 전 워싱턴포스트 회장 역시 언론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여걸이다. 남편의 자살(63년)로 신문사를 떠맡은 뒤 뚝심과 추진력으로 워싱턴 포스트사를 미국 굴지의 미디어 제국으로 키웠다. 특히 그녀는 권력의 위협을 뿌리치고 자유언론의 수호자 역할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1971년 미국의 베트남전 수행을 다룬 국방부 기밀문서 보도사건, 워터게이트 사건 등의 중대한 도전에 직면했을 때 그녀는 대통령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는 용기를 보였다.

그런가하면 세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CNN은 간판기자부터 여기자로 바뀌었다. 금세기 최고의 종군 기자로 평가받는 크리스티안 아만포(46)다. '전쟁이 있는 곳엔 아만포가 있다'(뉴욕 타임스)라는 헌사가 말해주듯 걸프 전 등 90년대 주요 분쟁지역을 넘나들며 숱한 특종을 낚아냈다. 연봉만 20억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의 여류작가 오리아나 팔라치(73) 역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종군기자 출신이다. 또 UPI통신기자로서 40년간 백악관을 지켰던 '할머니 기자' 헬렌 토머스(82)도 한시대를 풍미한 여성 언론인으로 꼽힌다.

◇국내는 몇시인가=우리나라에서도 여성 언론인 바람은 불고 있다. 첫 여성 주필이 됐던 한국일보 장명수 이사는 99년 중앙일간지 최초로 여성 사장에 올랐다. 여성 편집국장(코리아헤럴드 이경희, 일간스포츠 김경희씨 등 역임)과 주필(서울신문 임영숙, 한겨레 김선주 등)도 잇따라 탄생했다. MBC 이진숙 기자는 '한국의 아만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아직 일선에서 느끼는 분위기는 차가운 것 같다. 지난해 말 한국여기자 클럽이 18개 중앙언론사를 상대로 조사한 결과, 전체 기자 4402명 가운데 여기자는 462명(10.5%)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임원 비율은 0.4%(국장급 1.2%)에 불과했다. 지난해 한국언론재단이 설문조사한 결과에서도 여기자의 94%가 '(승진 등에서) 성차별이 있다'고 답했다.

이상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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