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이 당선인이 경제연구소장들 만난 까닭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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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수완이 좋은 것 같다. 철학까지 그렇다는 건 아니고 말이 오락가락하는 경우도 꽤 있다. 그러나 경제 문제에 관한 한 노무현 정부보다는 일을 처리하는 솜씨가 한결 나은 듯하다. 두 가지 사례 때문이다.

새해가 밝자마자 당선인은 경제연구소장들을 만났는데, 기자의 기억으론 과거 대통령 당선인이 이들과 공개적으로 만난 건 처음이다. 당선인이 왜 이들을 만났는지, 정확한 속내를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짐작하건대 다음의 이유 때문인 듯하다.

경제연구소는 국민의 경제 심리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이들이 좋지 않은 경제 전망을 내놓고 경기동향이 나쁘다고 발표하면 국민도 불안해진다. 이게 여론을 형성해 정부 정책을 움직인다. 그래서 그동안 정부는 경제연구소를 암암리에 컨트롤한다. 몇년 전 국책연구기관의 한 연구원이 ‘부동산 정책이 별 효과 없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냈다가 호되게 당한 적도 있다.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경제부처 공무원들은 늘 경제연구소의 전망이나 동향 보고서에 촉각을 세운다. 내심 못마땅한 성장률 전망치가 나오면 해당 연구소에 전화하는 경우도 꽤 있다. 그래서 억지로 전망치가 상향 조정되는 경우도 있다. 당선인은 경제대통령을 자임한다. 경제가 당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도 잘 안다. 심리가 경제에 얼마나 중요한지도 잘 아는 사람이다. 연구소장들 입장에선 당선인을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부정적 전망을 내놓기가 껄끄러워질 수 있다. 당선인이 내심 노렸던 건 이것이 아닐까.

지난해 12월 28일 서울 여의도에 있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관을 방문한 것도 그렇다. 대통령 신분까지 포함해도 국가 최고책임자가 재계의 총본산인 전경련 회관을 찾은 건 1979년 이후 처음이다. 재계로선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선인은 그룹 총수들과 만나 ‘딜’을 했다. 투자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만 요청한 게 아니라, 대신 규제 완화를 선물로 줬다. 이번 정부는 ‘친기업적인 정부’임도 보여줬다. ‘빅딜’이 아닐 수 없다. 재계 입장에선 투자활성화를 약속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당선인의 이 같은 행보는 세계 최고의 반기업 정서를 가진 국민 여론이나 노동계의 비판을 감안하면 ‘파격’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단기간에 경제로 승부를 보려면 재계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룹들이 각자 수천억원짜리 공장 하나 더 짓기만 해도 투자와 일자리 문제는 상당 부분 해결된다는 게 당선인의 속내였을 것 같다.

수완이 좋다는 건 CEO(최고경영자)대통령의 장점이다. 청계천을 복원할 때 수없이 현장을 방문하고 반감이 가득한 수천 명의 주변 상인을 만나 설득한 사람이 당선인이다. CEO들은 어떻게든 일이 되도록 만들고, 그럼으로써 성과와 실적을 낸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 점심이 없다. 장점이 곧 단점이기도 하다는 얘기다. 당선인이 빅딜을 선언한 이상 재계의 실천 여부를 일일이 챙길 게 분명하다. 한 재벌그룹 고위 임원은 “투자 여건이 안 되는데도 대통령이 직접 전화해 투자 여부를 챙길 것 같아 걱정”이라고 털어놓는다. 외환위기가 터지자 김우중 대우 회장은 2년간 수출 500억 달러란 아이디어를 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따지고 보면 이게 대우 패망의 한 원인이 됐다. 경제에 강박감을 갖고 조급하게 승부를 내려는 ‘CEO 갑옷’은 이제 벗어 던져야 한다.

김영욱 경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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