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단상>정치적 책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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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조선(造船)산업에서 전통적인 강자(强者)는 유럽국가들이었다.
이런 판도에 변화가 인 것은 50년대 후반.국가차원의 강력한 지원과 업계의 자체적인 기술혁신을 바탕으로 일본(日本)조선업계가 유럽을 제치고 선두로 나섰다.영국이 조선산업을 후진국형 산업으로 간주,등한시한 것도 이런 판도변화를 재촉했다.일본 조선업체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60년대 중반 이후 유럽전체의 건조량을 능가했고 지금도 최강자의 지위를 잃지 않고 있다.
이러한 판도변화에서 새로운 변수(變數)로 등장한 것이 한국이다.74년에야 대형조선소를 갖게 된 한국이 80년대 중반 이후유럽을 밀어내고 세계 2위의 조선국으로 자리잡았다.
그런데 최근 유럽연합(EU)과 일본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조선분야회의에서 한국업체의 설비확장에 대해 정부 개입을 요청하고 나섰다.한국업체의 증설이 세계조선시장의 수급불균형을 가져와 정부보조의 재개(再開)나 덤핑등을 촉발시킬 것이므로 한국정부가 「정치적 책임」을 지고 이를 억제하라는 논리다.
장기적 시황(市況)판단이야 다를 수도 있고 업계의 공존(共存)을 위해 영향력있는 나라들이 공동보조를 취하자는 발상도 있을수 있다.문제는 유독 한국에 대해「정치적 책임」운운하냐는 것이다.조선산업은 전.후방 관련산업에의 파급효과가 크고 군사목적과도 관련이 깊어 어느 나라에서건 국가차원의 관심이 높다.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계획조선같은 강력한 정부 지원책을 펴며 유럽을추월하던 시기에 이는 경쟁력에 입각한 국가간 구조조정의 하나로여겨졌지 「정치적 책임」을 따지 지는 않았다.두차례의 오일쇼크로 세계 조선산업이 장기불황에 빠져 각국이 설비감축에 나섰던 것도 기업의 생존전략이었지 「정치적 책임」을 지고 한 일은 아니었다. 냉전(冷戰)종식 이후 경제적 이해가 걸린 문제라면 각국이 더욱 각박해졌다고 하더라도 민간기업의 증설에 「정치적 책임」운운은 실로 가당찮다.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정부를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존재로 보게 만든 우리의 정부-기업관계가 이 런 가당찮은 요구를 자초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에 뒷맛이 영 개운치 않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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