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의 투쟁이 책 속에 있나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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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 24면

요 몇 년 브라운관을 달군 왕의 계보를 ‘대왕 세종’이 이었다. 웬만한 시청자라면 드라마만 봐도 역대 군주의 일대기와 치적을 꿸 듯하다. 새로운 왕조를 여는 것도 험난하거니와(‘태왕사신기’ ‘대조영’) 제왕의 자리를 수호하기도 쉽지 않다(‘이산’). 왕의 생애는 그 자체가 투쟁의 연속이며 그 투쟁의 저변엔 시대의 모순과 굴곡이 응축돼 있게 마련이다.

드라마에서 왕은 말 타고 전장을 누비고, 후궁들과 로맨스를 벌이며, 취기에 신료들과 싸우느라 ‘지적’인 위엄을 보여줄 틈이 없다. 좌탁에 펼쳐 놓은 책은 소품으로만 보인다. 하지만 역대 임금들, 특히 유교 성리학을 기반으로 삼았던 조선조에서 왕은 스스로가 뛰어난 학자이기도 했다.

집현전을 창설하고 훈민정음 창제를 이끈 세종은 ‘경서는 모두 100번씩 읽었고 그 외 책들도 꼭 30번씩 읽은’ 당대 최고의 학자였고, 정조는 우리 역사상 왕으로는 유일하게 184권 100책에 이르는 문집 『홍재전서』를 남기기도 한 ‘르네상스형 군주’였다.

그런데 왕마다 평생 되풀이해 읽었거나 특정 시기에 골몰했던 책이 다르다. 예컨대 『태종실록』엔 『대학연의』가 26번이나 등장하고, 특히 태종이 즉위 초에 신하들과 이를 함께 논했다는 기록이 자주 보인다.

『제왕의 책』 윤희진 지음, 황소자리 펴냄 256쪽, 1만3000원/『왕의 투쟁』 함규진 지음, 페이퍼로드 펴냄 384쪽, 1만5000원

반면 임진왜란을 겪었던 선조는 전란 뒤 『주역』에 몰두했다. 『선조실록』엔 『주역』을 진강했다는 기사가 137회에 이르며 선조가 다른 책을 읽었다는 기록은 거의 없다. 수라상에 오르는 찬 한 가지도 음양을 따지던 때, 왕이 택한 책이 사사로울 리 없다. 『제왕의 책』에 따르면 태종이 『대학연의』를 중시한 것은 왕권 강화의 철학적 토대가 돼줬기 때문이다.

『대학』의 뜻과 이치를 통치 차원에서 재해석하고 역사 사례를 덧붙인 『대학연의』를 강조하면서 태종은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료들을 제압해 갔다는 것이다. 한편 왕조의 존망 위기에 몰렸던 선조의 경우엔 난세를 사는 불안감이 역학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눈여겨볼 것은 『제왕의 책』에서 다룬 책들이 주로 경연(經筵)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경연은 왕이 학문이 높은 신하들과 벌였던 독서토론이다. 왕이 신하들의 의견을 듣는 자리임과 동시에 자신의 철학을 웅변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결국 왕의 애독서를 따라가다 보면 당시 왕이 그 책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정치 지형도가 보이고, 조선조를 관통하는 왕권과 신권의 갈등이 조명되는 것이다.

오죽하면 당쟁의 파란 속에 아버지 사도세자를 잃고 왕위에 오른 정조가 “임금 된 것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없다”고 했을까. 정조는 요순시대와 삼대 임금의 행적을 기록한 『서경』에서 능동적 정치가의 모범을 보았고(실은 그렇게 재해석했고) 이를 과거시험 등에 빈번히 출제하면서 개혁 철학을 설파하려 했다.

『제왕의 책』이 돋보이는 건 이렇게 왕의 책과 시대를 결합시키면서 ‘고전에서 찾아낸 왕의 지혜’를 조명한 점이다. 고려 광종의 『정관정요』부터 조선말 고종의 『효경』 『조선책략』에 이르기까지 10명의 왕과 그의 책들이 그렇게 훑어진다. 최근 조선사 붐이 일면서 웬만한 키워드는 한 번씩 역사서로 갈무리됐고, 왕을 소재로 한 책도 여러 권 선보였다.

『제왕의 책』 또한 엇비슷한 사료와 논문을 바탕으로 하되 ‘그때 왜 하필 그 책?’이라는 문제의식을 내세워 일종의 ‘추리’ 형식으로 글을 풀어간다. 이것이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편년체 서술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여기에 왕의 전기를 결합하고 고전의 명저들을 더불어 소개함으로써 흥미로운 대중교양서의 꼴을 갖췄다.

신권의 도전에 맞선 왕권의 응전과 갈등의 파트너십은 『왕의 투쟁』이 조명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세종·연산군·광해군·정조를 압축적으로 다루는 1부와 ‘제왕의 취미생활’ ‘왕의 여자’ ‘왕과 언론’ 등 미시사 중심의 2부로 나뉜다.

술술 읽히는 만큼 밀도는 떨어지는 편이다. 군주의 극적 일생과 시대의 굴곡을 맞물리는 역사 서술이 계속되고 있지만, 이런 유의 대중서 중 일찌감치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조선왕 독살사건』(이덕일 지음, 다산초당 펴냄)을 넘어서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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