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화장은 무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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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한 여자 후배와 밥을 먹다 들은 이야기. "대학 다닐 때 친했던 선배를 통 못 만나다가 며칠 전에 우연히 만났어요. 10년 만에 보니 너무 나이 들어 보였어요.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피부가 검고 칙칙한 게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아요. 그걸 보니까 정말 남자는 피부에 신경을 써야 하는구나 느꼈어요."

그 후배가 늘 외모에 신경을 쓰고 피부 관리 같은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여자인가 하면 전혀 아니다. 자신도 색조 화장은 아예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남자의 피부 관리에 대한 그 후배의 말은 더욱 귀담아들을 만하다.

나는 잡지 만드는 일을 할 때 남성용 화장품에 대한 기사를 몇 번 쓴 게 계기가 되어서 신문과 잡지에 화장품 이야기를 쓴 적이 많지만, 정작 내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꾸준히 얼굴에 뭘 바르기 시작한 것은 2년 전쯤부터다. 화장품의 성분과 원리를 공부하는 것도 흥미로웠고 새로 나온 화장품을 써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하지만, 나 역시 술을 한잔하거나 일에 지친 날이면 세수도 하지 않고 곧장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그런 남자다 보니 ‘꾸준하게’ 뭘 바르는 습관은 생기지 않았다.

앞의 여자 후배의 말처럼 나도, 남자는 피부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여자보다 더 써야 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면 깔끔하고 깨끗한 피부가 필수니까. 여자는 메이크업으로 가리기라도 하지만 남자는 그럴 수도 없으니까. 이런 이유들이야 요즘 많이 이야기되고 있다. 외모도 사회적 성공을 위한 무기라는 생각을 다들 갖고 있으며, 보다 젊은 세대일수록 자신을 가꾸는 데 주저하지 않는 듯하다. 내가 내 피부에 꾸준히 화장품을 바르면서 비로소 그런 이유들을 넘어 내 얼굴에, 내 피부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또 다른 이유를 발견했다.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내 얼굴을 살피고 꼼꼼하게 비누칠을 하는 동안 내 생활을 다시 점검하게 된 것이다. 밤 사이 뾰루지가 났다면 전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셨거나 좋지 않은 음식을 먹은 게 틀림없다. 에센스와 자외선 차단제가 들어 있는 로션을 바르면서 칙칙한 곳은 없는지 살핀다. 낯빛이 다른 날보다 칙칙하면 오늘은 일의 고삐를 조금 느슨하게 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피곤한 날이면 밤에 씻지도 않고 자던 옛날 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했지만, 아침 거울에 지저분한 얼굴이 비치는 게 싫어지면서 자연히 밤에도 깨끗이 씻고 자게 됐다. 화장품의 성분도 꼼꼼히 살피게 됐다. 화학성분이 지나치게 많지 않은지, 색소나 향 같은 불필요한 것이 들어있지 않은지 본다. 즉, 내 몸에 더욱 관심을 갖고 몸이 소리 없이 던지는 말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이다.

아침저녁 잠시나마 자신의 낯빛에 관심을 쏟는 것은 남들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를 넘어 자신이 스스로와 조화로운 관계를 맺는 일이다. 물론 나도 절제가 미덕이라 생각하지 못한 20대 때는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지만, 그 아침저녁의 짧은 의식은 나를 더욱 건강하게 만들고 있고 내 표정까지 바꿔 놓았다고 확신한다.

글 요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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