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 칼럼] '실미도' '태극기… ' 유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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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가 1천만명을 돌파했고 '태극기…'가 5백만명을 돌파했다. 이 영화들의 영화사적 의미를 밝히는 일은 영화평론가들의 영역이다. 영화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 특정 영화를 거론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라는 자문과 함께 '재미로 보는 영화'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무식은 아닐까 라는 두려움도 든다. 그러나 인구의 3분의1인 1천5백만명이 보았다는 영화는 영화를 넘어 시대의 물결이며, 그 물결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가를 지켜보는 것은 언론인의 소명이다.

*** 공산.자유주의자 같은 희생자 취급

'실미도'는 우리 사회의 가장 아픈 부분인 국가폭력 문제를 다루고 있다. '태극기'는 전쟁의 잔인함을 형제애라는 휴머니즘과 대비함으로써 요즘 우리 사회의 화두인 전쟁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는 우리 체제 내부의 치부를, 다른 하나는 남북 문제를 다룸으로써 이 시절의 시대적 관심과 일치되었다. 그 점이 이 영화의 인기를 폭발케 만들었는 지 모른다.

법을 초월한 국가폭력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민주화를 해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실미도'의 시나리오가 사실이든, 일부 허구(실미도를 못 떠나게 사살하라는 명령)이든 극적인 효과를 위해 제작자가 국가폭력을 극대화하여 묘사할 수 있다. 또 '태극기'에서 보듯 전쟁의 잔인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 속에서 꽃핀 휴머니즘은 언제나 영화와 소설의 중요한 테마다. 그런 점에서 전쟁 속에서 병사 개인이 받는 고통과 전쟁의 무의미성 등을 영화로 얼마든지 표현할 수가 있다. 그것이 극적일수록 성공한 작품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영화는 성공했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묘하게도 공통적으로 공산주의 문제를 다루는 시각이 비슷했다. '태극기'에서 국군들이 "빨갱이는 죽여 버려야돼"라면서 잔혹한 짓을 하는 모습을 부각시키거나, '실미도'에서 "빨갱이 아들이어서 그렇게 독하냐"라는 등의 언어를 통해 그가 빨갱이 아들이었기 때문에 부당한 차별대우를 받는 것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물론 그렇다. 빨갱이 아들이라고, 공산당에 부역했다고 사회적 차별을 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싸워온 것이고 이만큼 이루어 놓은 것이다. 문제는 두 영화의 메시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의 문제다.

과거 기관원들처럼 "그런 영화를 만들어낸 '저의'가 무엇이냐"고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국가폭력의 부당성, 전쟁의 잔혹상을 말하면서 그 메시지에 따라 붙는 '공산주의자나 자유주의자나 똑같은 희생자다'라는 몰가치한 메시지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물론 희생자임에는 똑같다. 그러나 희생이 똑같다 해서 공산주의나 자유주의가 똑같은 것은 아니다. 전쟁의 비참성은 똑같다. 하지만 전쟁의 책임에 대해서까지 똑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실미도' 군인들이 꼭 '적기가'를 불러야 극적인 효과가 나는가. '태극기'에서의 표현대로 '보도연맹'에는 모두 먹고 살기 위해, 보리쌀 두되 때문에 가입했는가. 예술의 이름으로, 혹은 '실미도' 감독의 말처럼 영화의 재미를 위해 이 정도는 괜찮은 것인가. 예술과 재미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 꼭 '적기가'를 불러야 했나

'실미도'와 '태극기'가 기록을 깨뜨린 지난주, 중앙일보에는 눈에 띄는 두 사건이 보도됐다. 얼어붙은 두만강을 넘어 북한을 탈출하는 세 남녀의 사진과 이집트에서 북한 군사고문단이 공동묘지에 숨어서 당나귀를 잡아먹다 들켰다는 소식이다. 가슴이 아팠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낯선 땅에서 당나귀를 몰래 잡아 먹었을까. 왜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너고 있을까. 그들은 이 시간에도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이다. 우리가 전쟁을 혐오하는 이 순간에도 그들은 전쟁준비를 하느라 국민을 희생시키고 있다.

우리 내부의 국가폭력이나, 전쟁의 문제는 북한이라는 존재와 연계되어 있다. 우리 영화가 과거 반공 일변도의 편식에서 벗어나 객관적 시각을 가지고자 하는 것 자체가 한편으로는 우리가 그만큼 강해졌다는 의미도 된다. 그러나 객관을 추구하되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까지 객관의 이름 아래 훼손되어서는 안된다. 예술의 자유는 마음껏 누려야 한다. 그것이 우리 체제의 장점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가 부메랑이 되어 더 큰 국가폭력 앞에, 전쟁 앞에 무너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문창극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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