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책갈피] 그녀, 몰리의 죽음은 네 남자 암투의 시작이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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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암스테르담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
미디어2.0, 208쪽, 9800원

유력 일간지 편집국장 버넌, 클래식 작곡가 클라이브, 외무부 장관 가머니, 출판 재벌 조지…. 네 명의 남자가 침울하고 스산한 런던의 겨울 하늘 아래 모였다.

네 남자가 모인 곳은 다름 아닌 이들 모두가 사랑했던 여자, 몰리의 장례식장이었다. 희미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그들은 각기 몰리와 사랑을 나누던 순간을 떠올리며 그녀를 추억한다. 한창 나이의 몰리는 갑작스런 병으로 죽었다. 한쪽 어깨 죽지의 저릿한 느낌에서 시작된 증세는 몇 주 만에 ‘침대’ ‘크림’ ‘거울’ 같은 단어를 잊는 정도까지 나아갔고, 끝내 스스로를 잊은 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얼마 뒤, 몰리의 유품에서 사진 한 장이 발견된다. 성적인 흥분 상태가 역력한 피사체는 그녀의 내연남인 외무부 장관이었다. 유력한 총리 후보로 꼽히던 그에게는 치명적 오점이 될만한 사진이었다.

사진을 맨 처음 손에 넣은 버넌은 이를 신문 1면에 싣기로 결정하고 이야기는 급물살을 탄다. 공개하려는 이들과 막으려는 이들의 암투는 현실정치의 일면과 닮아있다. 도덕성과 저널리즘, 우정과 죽음의 존엄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그들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향한다.

책에서 암스테르담은 상징적 공간이다. 마약·동성애·공창·안락사, 심지어 자살의 자유까지 허락되는 21세기의 유토피아인 그곳에서 몰리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이 하나씩 밝혀지고 주인공들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소설은 전체 5장으로 구성된데다 곳곳에 셰익스피어적 요소가 배치돼 있어 5막 희곡을 연상케 한다. 여기에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문체와 정교한 짜임새가 덧입혀져 이야기에 힘을 더한다.

작가 이언 맥큐언은 1998년 이 작품으로 영국 최고 문학상인 부커상을 수상했다. 그는 전후 영국에서 복지혜택의 젖과 꿀을 마시며 자란 세대에 주목했다. 성공한 그들이 만든 아름다운 세계를 조명하면서도 그 안에 숨은 사회의 그늘을 해부해냈다.

초반 진행속도가 느려 몰입하기가 어렵긴 하지만 일단 호흡을 맞추고 나면 어느 순간 빠져든다. 현실풍자와 블랙코미디, 예측하기 힘든 결말까지 스릴러가 갖출 수 있는 장점을 두루 갖춘 작품이다.

이에스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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