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바보의 벽(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건축가들에 따르면 근대 이전 서양 건물의 주인공은 단연 벽(壁)이었다. 대부분의 건물이 먼저 벽을 쌓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조적식 구조법(組積式構造法)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벽이 어떤 모습이며, 어떤 재질이고, 어떤 크기인지에 따라 건축의 형태.구조.내구성이 결정됐다.

이런 건축법은 벽의 역할을 크게 강조해 건물이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창이나 출입구를 크게 만드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인간이 건물을 지배하고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벽이 외부와 내부를 차단하는 새로운 울타리, 새로운 장벽으로 기능해 사람이 건물에 지배당하는 듯한 답답한 느낌을 갖게 했던 것이다.

이런 벽의 기능에 변화가 초래된 것은 근대에 들어 철근 콘크리트와 철골구조 등 재료의 혁명이 도래하면서다. 재료의 혁명은 자연스럽게 건축구조의 혁명을 초래했고 건물의 주체를 기둥이나 보로 전환시켰다. 이렇게 구조학적으로 벽의 기능을 약화시킨 가구식(架構式) 구조의 개발은 건물과 인간, 인간과 세상의 소통을 강조하는 모습으로 건축양식을 변화시켰다. 그래서 현대건축의 특징 중 하나로 외벽에 유리 같은 투명하고 소통성을 상징하는 재료를 많이 사용하고 벽이 적은 설계가 꼽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겐 이런 벽만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뇌속, 사고구조의 편협성이나 고질적 편견을 부추기는 논리.심리구조의 장벽도 있다. 이런 벽이 얼마나 인간을 억압했는지, 또 하나의 울타리 속에 갇혀 세상사의 흐름에 뒤떨어지는 기능을 했는지는 '귀가 절벽이다(전혀 소리를 듣지 못하다)' '담 쌓고 벽 친다(좋게 사귀던 사이를 끊고 서로 멀리하다)' 등의 용례와 '새벽 호랑이다(세력을 잃고 물러나게 된 신세를 비유해 이르는 말)' 등의 속담에서도 알 수 있다.

지난해 일본에서 선풍적 인기를 끈 '바보의 벽'의 저자인 요로 다케시(養老猛司)는 똑같은 정보를 주어도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스스로의 벽'이야말로 시대와의 소통, 사람과 사람 간의 소통을 방해하는 '바보의 벽'이라고 말한다. 노무현 정부 출범 1년, 서로 간의 소통의 단절과 오해를 하소연하고 분노와 갈등.비난을 외치는 목소리 속에 이런 '바보의 벽'은 없는지 우리에게 자문해 볼 때다.

김석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