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서울대학교>서울大 이모저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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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서울대는 개교당시부터 진통을 겪었다.
해방직후 과도기때 남한을 통치하던 美군정청은 46년8월 「국립서울대학교설치령」을 법령 102호로 공포하고 초대총장으로 법학박사인 해리 B 앤스테드 미군대위를 임명했다.
일제하 경성제국대학의 후신인 경성대학과 경성의전.경성법전.경성사범.수원농전등 10개 관.공립 고등교육기관을 통합해 국립서울대학교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1년여동안 대학가는 동맹휴업 등 극심한 좌우대립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이른바 「국대안(國大案)파동」이다.
당시 군정청 문교차장이었던 오천석(吳天錫)박사의 구상으로 알려진 이 案에 통합당사자들이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예컨대 경성대 의학부가 경성의전과의 통합으로 격을 낮출 수 없다고 주장하자 경성의전측은 오랜 역사를 가진 학교의 문을 닫을 수는 없다고 반대하고 나섰다.
초기에 자존심대결의 양상이 짙던 반대운동은 국대안이 시행되면학원이 美군정의 통제권 속으로 들어가 자율권이 침해되고 「식민지화」를 막을 수 없다는 논리를 주장하고 나온 좌익세력이 가세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입학예정자 8천 여명중 3천여명이 등록을 거부한 가운데 최초의 입학식이 9월18일 문리대 교정에서 거행됐다.서울대는 단과대중 마지막으로 의대가 입학식을치른 10월15일을 공식적인 개교기념일로 지정,내년으로 50주년을 맞게 된다.
소요는 개교이후에도 계속돼 전국적인 동맹휴학.교수사퇴 운동으로까지 발전하면서 좌.우익 학생들이 캠퍼스내에서 물리적 충돌을빚는 불상사도 줄을 이었고 3천여명이 제적되는 진통끝에 1년이지나 진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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